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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10>지배 당위성 vs 역사성 논란 팽팽 “해결 불투명”

‘남쿠릴열도’(북방영토)둘러싼 러·일 분쟁

   북방영토는 쿠릴열도 포함 안 돼, 고유영토론 주장
영토귀속은 국제조약에 기반, 법률적으로 결정돼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쿠릴4도’는 러시아령
영토는 국가 간 대결 결과물, 고유영토 존재치 않아


올해 모스크바에서는 2차 대전 전승 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거행한바 있고 일본에서는 러일전쟁 100주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학술대회가 열리고 있다. 이는 러일 양국이 아픈 과거보다는 영광스런 기억을 더 부각시키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러일 양국이 강조점을 찍고자하는 사건이 다르듯, 상이한 역사인식과 접근방법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양국 간 현안이 있는데 그것이 이른바 ‘북방영토’문제이다.
소위 ‘북방영토’와 ‘북방4도’란 홋카이도(北海島) 이북에 위치한 4개 도서(하보마이齒舞諸島), 시코단(色丹島), 에토로후(擇促), 쿠나시리(國后)를 일컫는 일본식 표현이다. 이 같은 호칭은 4개 도서에 대해 일본이 주권을 향유하고 있음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국제적으로는 일본이 호칭하는 ‘북방4도’ 혹은 ‘북방영토’라는 용어보다는 러시아의 지명인 ‘남쿠릴열도’로 통용되고 있다. 문제의 도서들은 총면적 4996㎢로 오키나와보다 약간 크며 홋카이도와 러시아의 캄차카반도 사이에 징검다리 모양으로 늘어선 22개의 쿠릴열도 가운데 최남단 4개 도서를 지칭한다.
북방영토 문제가 제기된 직접적인 계기는 제2차 세계대전을 결산하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1년)의 체결이다. 패전국 일본이 이 조약에 조인한 국가들에게 쿠릴 열도를 포기하기로 약속하면서 이 섬의 영유권문제가 싹트기 시작했다. 요컨대 ‘북방4도’가 쿠릴열도에 포함되느냐의 여부에 대한 러일 양국의 상이한 해석과 인식이 북방영토문제의 핵심인 것이다.
이에 대한 일본정부의 입장은 ‘고유영토론’으로 대변된다. 고유영토론이란 북방 4도 가운데 하보마이 군도와 시코탄은 홋카이도의 일부이며, 구나시리와 에토로후는 시모다(1855)조약이래 일본고유의 영토이기 때문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포기한 쿠릴열도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그 요지이다. 따라서 일본은 북방4도가 그들의 고유영토이기 때문에 이를 북방영토라 부르며 러시아에게 반환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 법률적 근거로 일본은 1855년 시모다(下田)에서 체결된 러ㆍ일和親條約을 든다. 이 조약 2조에는 “금후 러시아와 일본의 국경을 에토로후 섬과 울부(得撫)섬 사이로 한다”고 정했다. 즉 1855년 조약을 통해 에토로후 이남의 4개 도서는 러시아에 의해 일본의 영토로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20년 후에 체결된 사할린ㆍ치시마 교환조약(1875)에서는 러시아에게 사할린섬을 모두 주는 대신 일본은 울부 섬에서 슘슈(古守)섬까지의 쿠릴열도 18개 섬을 인수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북방4도와 쿠릴열도는 별개로 보아야한다는 것이 고유영토론의 골간이다.
러시아는 ‘전후 일련의 국제조약 및 결정’에 따라 하보마이, 시코단, 쿠나시리, 에토로후가 러시아영토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 일련의 조약과 결정이란 얄타협정(1945년 2월), 포츠담선언(1945년 7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1년)등을 가리킨다. 요컨대 얄타협정에서 루스벨트와 처칠은 스탈린에게 소련의 대일참전 조건으로서 쿠릴열도를 소련에 인도하기로 결정했으며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 2조에서 “일본은 쿠릴열도와 일본이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 조약의 결과로 주권을 획득한 사할린의 일부와 그에 인접하는 도서에 대한 모든 권리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고 규정했기 때문에 남쿠릴 4도(Four Southern Kuril Islands)는 러시아령이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 같은 조약의 근거에 대해 일본은 다음과 같이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즉, 얄타협정은 연합국의 수뇌들 간에 전후처리 방침을 진술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하물며 그 협정에 참석하지 않았고 그 존재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는 일본을 구속할 법적인 구속력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쿠릴열도의 지리적 범위 및 귀속처를 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일본으로서는 이 조약에 조인하지 않았던 소련과 그와 같은 사항들에 관해 독자적으로 교섭해야할 문제로 판단한다는 것이다. 북방4도에 대한 일본의 이 같은 대응논리는 1981년 일본 내각회의에서 1855년 시모다(下田)조약 체결일인 2월 7일을 ‘북방영토의 날’로 지정함으로써 국가적 규모의 반환운동의 차원으로 발전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정부는 북방영토 문제를 러?간의 우호관계 수립에 최대의 장애물로 간주하고 있다. 러시아 또한 양국 간의 영토문제는 이미 해결되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의 영토반환 요구는 불법적이며 근거 없다고 일축하고 있다. 결국 러일 간에 미해결된 북방영토 문제는 국제법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양국관계를 ‘전쟁의 지속’상태에 놓여있게 한 핵심요인이 되고 있다.

러일 간의 표면적인 영토분쟁 저변에는 양국 간의 상이한 영토인식이 영토분쟁을 영속화시키는데 일조하고 있다. 일본은 자국의 영토를 한 번도 빼앗긴 적이 없는 나라이다. 또한 사면이 바다라는 이상적인 자연국경으로 둘러싸여 자국의 영토가 타국의 그것과 완전히 구별되어온 국가이기도 하다. 특히 그들은 지리상의 국경이 동시에 민족, 언어, 문화, 정치, 행정상의 경계선과도 일치하는 지구상에서 보기 드문 동질성을 지닌 국가라고 자부하고 있다. 이 같이 믿음은 일본인들로 하여금 고유영토에 대한 신봉자가 되게 했다. 이는 영토라는 것은 뺏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기 때문에 국경선은 항상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유동적이라는 러시아식의 사고방식과는 대립된다.

조어도의 위치
남쿠릴 열도에 대한 러시아의 영유권 표기 지도(자글라딘, 20세기세계사, 2003)

그러나 일본인들이 신봉하는 ‘고유영토론’의 이면에는 다음과 같은 의도성이 엿보인다. 즉 영토의 귀속은 전쟁의 승부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북방영토의 귀속은 러시아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제 2차 세계대전의 결과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국제조약에 기반, 법률적으로 결정되어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의 당위성을 강화하려는 것이다. 이에 일본은 국경의 변경이 당사국간의 합의 또는 외교교섭의 결과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판단한다. 따라서 일본은 북방영토 분쟁을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해서 그 결정에 복종할 용의가 있음을 누차 강조해오고 있다.

한편 러시아 역시 북방4도가 러시아의 고유한 영토라 믿고 있다. 그 근거는 러시아인들이 먼저 쿠릴열도를 발견하고 개발했다는 것이다. 1984년 구소련에서 출판된 ‘18세기 초 러시아의 태평양 북부탐험’이라는 책에서 이미 17세기 후반부터 러시아황실탐험대가 태평양북부에서 활동을 개시한 정황들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1691년 러시아인들이 가장 먼저 쿠릴열도에 도착했고 이후 이 섬에 거주하는 아이누 족에 대해 가장 먼저 알게 되었다고 기술돼 있다. 또 러시아인은 자연적 역사적 원인에 의해 일본과 정반대의 영토관을 갖고 있다. 러시아인은 광대한 국토를 갖고 있으면서도 고유의 천연국경의 혜택을 받지 못했고 무방비의 대초원에 살면서 외적의 침입에 대처하지 않으면 안됐다. 이 같은 환경에서 자라난 인간에게 영토는 변화무쌍한 존재다. 따라서 그들은 영토란 인접국과 힘의 대결의 결과, 확대되기도 하고 축소되기도 하는 신축성 있는 성격을 지닌 것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이를 일본 “고유영토론” 반박의 논리적 근거를 이루고 있다.

러시아 역시 일본의 견해에 반박하는 법률적 토대를 갖고 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일본의 영토요구가 역사적으로나 법률적으로나 근거가 없음이 명확해진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일본은 러일전쟁과 시베리아 출병 등 침략적 행위를 저지름으로써 이미 양국 간에 체결된 각종 조약들을 스스로 훼손하여 무효화시킨 바 있다는 것이다. 이에 러시아는 고유영토론, 국경불변론을 앞세운 일본의 영토반환 요구가 근거 없는 억지논리라고 단정한다. 또 러시아는 제2차 세계 대전의 결과로 생긴 현상을 변경하는 일은 국제질서의 안정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2차 대전에 의해 결정된 국경은 불가역, 불가침이라는 논리를 제기하고 있다. 이는 비록 남쿠릴4도를 점유하고 있는 러시아의 입장이 법률적으로 취약하더라도, 전후체제라는 총체라는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영토문제에 대해 현상을 유지하려는 러시아의 입장을 보다 강화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개별적인 조약·협정보다는 2차 대전의 결과로서 형성된 전후질서를 유지하는 일이 국제적으로도 평화와 질서를 담보하는 일이라는 소위 전쟁결과 부동론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러시아가 취해온 입장이다.
조어도의 위치
북방4도를 일본 자국 영토로 표기하고 있는 새로운 사회과지도(동경서적, 2004)
  그 결과 ‘북방4도’에 대한 양국 역사교과서의 서술방식 역시 뚜렷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서술상의 강조점이 다르다는 얘기다. 일본교과서는 북방4개 도서의 역사성에 초점을 맞춰 오래전부터 일본의 고유영토임을 부각시킨 반면 러시아교과서는 남쿠릴 4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의 당위성에 초점을 맞춰 2차 대전에서 독일과 일본을 괴멸시키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소련의 역할을 부각시키고 있다. 일본교과서는 북방4개 섬이 일본의 ‘고유영토’임을 입증하기 위해 이 섬들이 침략과 탐욕의 산물이 아니라 역사적인 과정을 통해 평화적으로 자국의 고유한 영토가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2005년판 후쇼사 교과서에서는 일본정부는 “러시아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1875년 러시아와 사할린ㆍ치시마교환 조약을 맺었다. 조약의 내용은 일본이 사할린 전토를 러시아에 양도하고, 그 대신에 치시마열도(쿠릴제도)를 일본령으로 한다는 것이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또 명치초기의 국경획정 지도를 첨부하여 러일 간의 영토 확정의 역사를 1855년에 체결된 일러화친조약 시기까지 끌어올리고 있으며(일본사 A, 동경서적, 2004년; 신중학교역사, 청수서원, 2002년) 사회과지도에 북방4도를 자국의 영토로 표기하고 있음은 물론이다(새로운 사회과지도. 동경서적, 2004년). 요컨대 이미 오래전부터 북방4개 도서는 러시아로부터 평화적인 조약을 통해 일본의 고유한 영토로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반면 러시아의 교과서는 남쿠릴4도와 관련하여 소련군의 대일참전을 계기로 2차 대전이 종식되는 과정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러시아의 남쿠릴4도 점유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해 첫째, 소련이 대일전쟁에 참전하지 않았으면 2차 대전은 적어도 18개월은 더 지속되었을 것이라는 점(자로바, 미쉬나, 20세기 러시아사, 1999) 둘째, 2차 대전에서 소련이 입은 인명피해만 2700만에 달했다는 점(다닐로프, 코술리나, 20세기 러시아사, 1995) 셋째, 소련은 얄타회담에서 사할린남부와 쿠릴열도, 여순의 조차권과 만주의 철도에 대한 중국과의 공동 개발권을 확보함으로써 러일전쟁이후 제정러시아가 상실한 지위를 회복하게 되었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자글라딘, 20세기세계사, 2003).
상술한 바와 같이 러일 간의 북방4도 문제는 양국의 영토인식과 교과서 서술에 비추어볼 때, 해결가능성이 불투명해 보인다. 특히 북방4도 문제는 한일 간의 현안인 독도문제와 유사한 성격과 연혁을 지닌 바, 일본의 요구에 대한 불법성을 지적하고 효율적인 대응논리 개발을 위해서라도 지속적으로 살피고 연구해야할 비교의 대상이라 할 수 있다.


고구려연구재단 연구위원 최덕규 연구위원


다음 회는 배성준 고구려연구재단 연구위원의 '한중 영토분쟁-간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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