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아이를 잘 못 기르고 있는 것 같아요.”
퇴근 후 넥타이를 풀고 있는데 아내가 눈물을 글썽였다. 얘긴즉 오늘 작은녀석이 다니는 어린이집에서 콜라회사 견학을 갔단다. 입구에서 마개를 딴 작은 콜라병을 하나씩 나눠주었는데 출구에서 그 병을 회수하더란다. 그런데 대부분의 아이들은 콜라를 다 마셨거나 아니면 남은 채로 그냥 병을 내주고 밖으로 나오는데 우리집 아이만 반 넘게 남은 그 콜라를 즉석에서 마구 마셔대더란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는 가느다란 목이 막혀 캑캑거리면서 ….
그랬을 것이다. 제 부모를 닮아 몹시도 소심한 그 녀석은 음식을 아끼면서 먹는 버릇이 있었다. 그 콜라병도 통째로 다 주는 줄 알고 평소처럼 몹시 아끼면서 마셨을 것이다. 그리고 아내의 말은 우리가 애들을 너무 인색하게 키우지 않느냐는 뜻일 것이다. 눈물 글썽이는 아내의 말을 듣는 나도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래서 내가 ‘여섯 살짜리 어린아이가 그렇게 남은 콜라를 그냥 내주는 것보다는 아까워하며 마시는 것은 지극히 정상’이라고 말했다. 아내는 안쓰러운 표정이 다소 누구려지긴 했지만 여전히 가슴 아픈 모양이다.
평소 작은녀석은 제 형보다 훨씬 말도 많고 탈도 많고 또 까탈스러웠다. 그리고 항상 제 몫을 챙기려 하고 또 제 물건을 몹시 아꼈다. 나는 막내라서 그러려니 하고 예사로 생각했다. 그런데 무심한 우리 가족의 생활 방식이 뜻밖에도 작은녀석에게는 무엇에 대한 결핍감을 무척이나 느끼게 했나보다. 이것이 작은녀석의 성격 형성에 꽤나 부정적으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녀석이 초등학교 다닐 때였다. 식구들이 간식을 먹을 때 항상 작은녀석은 눈치를 슬슬 보면서 제 몫을 챙기려 들었다. 과일을 썰어놓고 식구들이 둘러앉아 먹는 날은 쟁반의 바닥이 보일라치면 녀석은 미리 서너 개를 손으로 움켜쥐는 것이었다. 못하게 나무라니까 다음에는 손바닥으로 슬그머니 과일 쟁반을 덮기도 하였다. 나는 녀석의 버릇없는 이 음식 욕심을 어떻게 하면 고칠까 싶어 몇 번은 야단을 치기도 하였다.
그러던 가을, 녀석이 초등학교 1학년 때 저녁 간식 시간이었다. 서너 개의 사과를 깎아 작은 접시에 담아놓고 음료수를 곁들여 먹으면서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잡담들을 나누고 있었다. 사과 조각 사이로 접시의 바닥이 드러날 즈음이었다. 작은녀석이 제 형을 쳐다보면서 오른손으로 사과 조각을 한 입 가득 밀어 넣어 씹으면서 또 왼 손으로 사과 조각을 하나 쥐어 가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하던 제 형이 무심코 사과 조각을 하나 더 입으로 가져가자 사과 조각을 쥔 왼손으로 다시 겹쳐 쥐는 것이었다. 오른손은 여전히 제 입보다 더 큰 사과 조각을 밀어넣고 있었다. 작은녀석의 눈은 잠시도 제 형의 손과 입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때야 내가 발견한 것이다! 큰녀석은 작은녀석보다 약 3배의 속도로 사과를 축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나는 두 녀석을 아버지의 입장에서 떠나 좀 더 객관적으로 살펴보았다. 두 살 터울의 제 형은 녀석보다 덩치도 크고 체격도 튼튼했다. 공부나 운동 등 무엇이든 동생보다 잘 했다. 자기가 모르는 것을 형은 죄다 알고 있었다. 동생의 입장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한계였을 것이다. 그래서 작은녀석은 늘상 자기는 동생이니까 무엇이든 형보다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해왔다. 자기는 덩치도 작고 어리니까 형보다 많이 먹어야 잘 큰다고 말하곤 했다. 목욕탕에서 뜻밖의 걱정을 하는 녀석에게 좀 더 자라면 마찬가지라는 설명을 해 준 적도 있었다. 그런데 녀석의 그 깊은 곳에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운명적 경쟁심도 아울러 지니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리고 무엇보다 두 녀석은 먹성이 엄청난 차이가 나는 데다 더구나 작은 녀석은, 지금도 그렇지만, 저가 말을 할 때는 음식을 잘 안 먹는 버릇이 있었다. 저는 형의 절반도 채 못 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 간식 시간에 작은녀석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으랴.
사과 조각을 꼭 쥔 작은녀석이 유난히도 더 여리게 보인다. 부모가 되어 가지고 이 작은 꼬마의 나이나 덩치나 성격을 채 깨닫지도 못하면서 음식 욕심낸다고 나무라기만 하였으니…. 아내도 막내이지만 더구나 나 자신 7남매 중의 층층시하(層層侍下)가 아니었던가. 막내둥이 엉덩이 토닥거려 주는 집안 분위기도 아니었고, 또 우리 시대는 다 그러했겠지만, 온갖 물건들 물려받아 입고 또 얻어 신어 긴 소매 걷어올리고 큰 신발 끌면서 자라, 경험 속의 [내 것]에 얼마나 굶주려 있었던가. 나도 어릴 때 네 살 터울의 누나와 먹는 것을 두고 얼마나 많이도 다투었던가. 지금까지도 막내의 운명적 아쉬움을 절절히 느끼고 사는 사람이 아닌가. 이런 내가 막내의 사정을 이렇게도 모르고 7년이나 키웠다니…. 더구나 내가 학교 선생이라니….
그날 막내의 작은 손과 입을 바라보면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나의 자책감은 매우 컸다. 지금 생각해도 미안한 마음이다. 나는 즉시 사과를 나누었다. 네 식구 각각 두 조각씩 분배하고는 남은 한 조각은 작은녀석에게 보태 주었다. 그리고 잠시 후 나의 몫에서 한 개를 작은녀석에게 또 주었다. 아내는 금방 다 먹어버린 큰녀석에게 한 조각을 건네주었다. 그때야 막내는 확보된 제 몫의 확실한 사과 조각을 앞에 두고 천천히 먹으면서 잡담을 하는 느긋함을 보였다. 그날 이후로 나는 간식을 먹을 때는 물론이려니와 무슨 일을 할 때는 작은녀석을 눈에 보이지 않게 우선 배려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녀석은 이런 사소한 일에 점차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되는 것 같았고 성격도 다소 너그러워지는 모습으로 변하는 것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이날은 대가족 생활 속 올챙이 시절의 아픔과 소외감을 망각해버린 나 자신의 무신경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어린이를 어린이답게 바라보는 부모 되기, 선생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깊이 생각한 하루였다.
-서태수 부산 혜광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