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폭력을 뿌리 뽑아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확산되면서 그동안 많은 대책들이 논의돼왔다. 그 결론의 하나로 구체화되고 있는 것이 ‘스쿨폴리스’ 제도인 것 같다. 이미 부산 지역을 비롯한 몇몇 학교들에서 시범학교 운영을 거쳤고 그 결과가 매우 효과적인 것으로 판명돼 가까운 시일 안에 이 제도를 확대한다는 방침이 굳어지고 있는 것 같다.
폭력이 두려워 자녀를 마음 놓고 학교에 보내지 못하는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무슨 방법인들 쓰지 못하겠는가. 학교에 몸담고 있는 우리 역시 이 막다른 골목에서 무슨 방법을 쓰든 그저 고마워해야만 할 일인지 모르겠다. 교육력이 극도로 허약해진 상황에서 이제 교사들의 힘으로는 학교폭력을 어쩌지 못하겠다는 심정으로 경찰력의 도움을 받는 것이 차라리 속편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스쿨폴리스 제도는 학교가 취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일 가능성이 크다. 학교교육이 교육의 논리를 벗어나 물리적인 힘이나 강제력에 의존하여 통제하는 일이 관행으로 굳어지게 되면 자칫 우리 교육이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널 수도 있는 것이다.
최근의 움직임은 교육자들의 공감에 기초하기보다는 학교를 불신하는 사회풍조에 편승해서 이뤄지는 감이 있다. 불과 몇 달 동안의 시범학교 운영이 성과적이라고 해서 이를 확대 또는 일반화하려는 생각도 성급하고 경솔해 보인다.
교육은 법과 규정에 의해 다스리는 통제활동이 아니다. 학교가 체벌 대신 훈육의 방법을 사용하고 인간주의 지도방법을 고수해야 한다는 주장은 교육학의 본질적 논리이다. ‘경찰’의 이름으로 교내를 통제하기보다는 오히려 학교 밖에서 보호해주려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 더 현명하지 않을까.
스쿨폴리스가 퇴직경찰이나 교원들로 조직되기 때문에 결코 물리적·강제적이 아니라고 하거나 스쿨폴리스를 ‘배움터지킴이’로 고쳐 부른다 해도 상황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교육의 본질이 왜곡되고 전문적인 지도역량이 위축될 가능성을 배제해선 안 될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몇몇 국가들이 이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고 해서 정당성을 호도하려 하거나 그 합리성을 강변하려 해서도 안 될 것이다. 총기 사용이 자유롭고 고도의 개인주의가 팽배한 미국사회를 우리 사회와 평면적으로 비교하는 일은 대단히 위험할 수 있다.
사실 학교폭력의 근원은 학교 그 자체가 아니지 않는가. 문제는 외부의 폭력과 연결되어 있거나 학교들 사이에서 조직으로 집단적인 폭력을 휘두를 때이다. 학교폭력의 근원으로는 오히려 날로 파괴되어 가는 가정과 부도덕한 사회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 학생들은 잠재적 폭력집단이 아니지 않은가.
교육은 결코 시행착오가 허용될 수 없는 영역이다. 이제까지 그러했던 것처럼 또 하나의 시행착오를 초래한다면 학교교육은 의외의 상처를 입게 될 수도 있다. 학교교육은 교원들의 철학에 맡겨주는 것이 옳다. 학교가 교육역량을 키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현명하지 않겠는가. 교육에 관심을 가진 많은 시민과 기관들은 학교 밖에서, 그리고 한 걸음 비켜서서 도와 줄 수 있는 방법들을 모색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