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알게 된 한 호주 여대생은 학업과 밥벌이를 병행 하느라 휴일도 없이 일을 하는 통에 최근에는 체중이 부쩍 줄었다며 하소연을 한다. 고등학교 때부터. 커피 전문점과 수퍼마켓 점원, 식당일, 소수민족 대상 영어강습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버느라 늘 피곤하다는 것. 하지만 지금 생활에 만족한다며 웃음을 짓고 다닌다.
멀쩡한 부모두고 말그대로 고생을 사서 하고 있는 이유는 단지 '집에서 나오고 싶어서' 였단다. 그 학생은 부모 곁을 떠나려면 경제적 독립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고등학교 10학년 때부터 돈을 벌기 시작해서 지금에 이르렀다며, 앞으로도 고된 생활을 해야 하지만, 그래도 혼자 꾸려가는 생활이 마냥 즐겁단다.
이 학생처럼 호주의 10대들은 부모 곁을 떠나고 싶어 그야말로 안달이다. 비단 호주 뿐 아니라 어느 나라든 10대 청소년이라면 대부분 집에서 나와 친구들과 지내거나 혼자 생활하고 싶어하기 마련이지만, 막상 실천에 옮기기는 쉽지 않다는 점은 본인들이 더 잘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호주 10대들 가운데는 14, 15세만 되도 부모를 떠나기 위해 '구체적 채비'에 들어가거나 예행연습(?)을 시작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14~16세 호주 청소년 7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 의하면 부모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보다 또래 모임이나 스포츠 클럽, 취미 동아리 등으로 그룹을 지어 모이기를 좋아하며, 집에 있는 것보다 친구들과 한 집에 모여 놀거나 공원, 바닷가에서 배회 하는 것이 더 좋다는 응답이 절반을 차지했다. 이처럼 부모와 떨어져 지내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최근에는 적극적으로 돈벌이를 하러 나서는 사례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빅토리아 주에서는 고등학교 1학년에 해당하는 16세 나이에 주당 10시간씩 일을 하는 청소년들이 3분의 1이나 되며, 이들 대부분이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지고 있는 것 같아 어른이 된 기분"이라며 매우 만족해 한다는 것. 보통 방과 후 일주일에 한 두 시간 아르바이트를 해서 용돈 정도를 벌던 것을 이제는 본격적인 독립준비 단계로 비중을 높이는 중 고생들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일찌감치 집을 떠나 독립하고 싶어하는 자녀들을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은 어떨까. 자녀들의 이른 독립은 한편 가족간의 이른 단절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높다. 응당 18세가 되면 나갈 자식들이 그보다 더 서둘러 집을 빠져 나가려 하는 것이 못내 서운한 것이다. 호주 청소년들의 '조기 분가 바람'은 최근들어 부쩍 거세지는 추세인데 불과 2년 전에만해도 성인 자녀들의 독립비율이 예년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기존의 18세 분가 현상이 2년 전, 한차례 주춤해졌던 것인데, 비싼 주택 임대료나 하숙비 등을 충당하기 벅차며, 설혹 경제적으로 여건이 갖춰져도 직접 밥을 해 먹고 살림을 살아낼 자신이 없기 때문에 분가를 꺼려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결혼을 하든 안 하든 20대, 심지어 30대 중반이 되어도 좀체 분가할 생각이 없고, 그냥 부모와 함께 사는 경향이 높았던 것인데, 그같은 경향은 남자가 여자보다 많아 18세에서 34세 사이 호주 젊은이들의 3분의 1이 독립을 하지 않고 부모와 함께 살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처럼 성인이 되어도 독립하지 않은 채 둥지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빗대어 'crowded nest syndrome(붐비는 둥지 증후군)'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날 정도로 호주 젊은이들의 부모와의 동거율이 40% 대를 육박했던 현상이 불과 2년 만에 경향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고 부모들이 다 큰 자식들이 집을 나가지 않는다고 구박하거나 눈치를 주기는 커녕 물질적 정신적으로 고된 뒷바라지를 하면서도 오히려 함께 살아주는 것을 대견해 하면서, 자식을 다 키워 떠나 보낸 뒤 찾아오는 중년의 고독감과 이른바 'empty nest syndrome(빈 둥지 증후군)'을 연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 당시 부모들의 심정이었다. 자식이 떠나고 나면 갑자기 늙어버리는 느낌과 노년의 단계로 급속히 접어드는 듯한 심적 부담을 떨치기 어렵기 때문에 다 큰 자식들과 애면글면 함께 사는 것은 젊음을 유지하는 한 방편도 된다며 위안을 받았던 것.
하지만 이제 다시 어린 자녀들이 집을 떠나기 위해 꿈틀대고 있다. 부모 자식간에도 받을 건 받고, 줄 건 주는 확실한 계산을 하고, 부모의 인생과 자식의 인생이 여간해서는 함께 끈끈한 정으로 얽히는 일이 없는 호주인들의 냉랭한 삶이 이런 식으로 일찌감치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