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전통 교육은 유학이 지배적 중심을 차지한다. 그 중에서도 주자학(성리학)은 우리 선조들의 삶의 세계를 주도했다. 지금도 우리의 의식·무의식 저편에 자리하고 있는 유학적 사유다. 단적인 예로 스승을 공경하고 제자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은 우리 사회가 다른 어떤 사회보다 높은 수준을 유지해 왔다. 그것은 유학적 사제동행관(師弟同行觀)이 짙게 배어 있는 하나의 예악(禮樂)이다. 어떤 에토스가 그런 삶의 의식을 유인했을까? 그 결정적 중흥의 계기는 우리 역사에서 주자학을 도입한 것으로 기록된 ‘안향(安珦)’이라는 지적 거장의 활동이 아닐까?
시대적 사명감으로 교육에 앞장서
1970년대 중고교 역사 시간에 등장하는 안향은 ‘주자학을 도입했다’라는 짤막한 소개로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안향이 주자학을 전래하여 학문을 장려하고 인재를 양성하려고 했던 배경과 노력 과정을 이해하면 그의 위대성은 더욱 돋보인다.
안향이 활동하던 시기, 고려는 장기간의 무신 세력이 집권하여 정치적으로 불안정하였고, 몽고의 침탈로 국가 주권이 상실 위협에 놓이는 등 국내외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처한 상황이었다. 뿐만 아니라 고려 건국 때부터 중시되었던 불교도 부패하여 흉흉한 민심을 바로 잡아 주지 못하고 미신과 무속이 성행하고 있었다.
안향은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들어섰다. 당시 고려는 90여년이라는 장기간의 무신 집권 체제가 막을 내리고, 몽고와의 전란도 종식된 시점으로, 고려사에서 새로운 시대를 모색하던 시기였다. 이때 국가도 신흥 관료 등용 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이에 부응하여 안향도 관직에 진출하게 되었다. 특히 안향은 뛰어난 문장력을 인정받아 왕의 교지나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등 국사에서 중요한 업무를 담당하면서 빠르게 승진하였다.
안향이 위대한 교육자로서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한 계기는 36세 때다. 학문 진흥과 교육을 담당하는 직무인 국자사업(國子司業)에 임명되면서 교육적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그의 탁월한 유학적 소양과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안향은 새로운 인생의 지형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학문(유학)을 일으키고 인재를 양성하는 일을 나의 임무로 삼는다’는 삶의 각오였다.
학문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다
안향이 47세 되던 해, 국가는 그에게 학문(유학) 진흥과 교육 부문의 명예수장인 고려유학제거(高麗儒學提擧)의 임무를 부여했다. 이를 계기로 안향은 당시 국왕인 충렬왕의 원나라 행차를 수행했다. 그리고 원나라의 수도(현재의 북경)에서 우리 역사의 일대 전환을 가져올 문화적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주자학풍이었다.
주자학을 접한 안향은 주자의 사상을 마음 깊이 찬동하고, 주자를 유학의 정통 학맥으로 인정했다. 그리하여 주자의 글 중에서 중요한 것을 손수 하나하나 베꼈다. 또한 유학의 창시자인 공자와 그것을 중흥시킨 주자의 초상화를 모사하여 이듬해 봄에 귀국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 주자학이 본격적으로 전래된 계기다. 이후에도 두어 번 원나라를 다녀오면서 그의 신념은 더욱 확고해진다.
안향은 56세 때, 집현전태학사(集賢殿太學士)·수문전태학사(修文殿太學士) 등 국가의 교육과 관련한 관직을 맡았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학문 진흥과 교육 사업을 담당했다. 특히 59세 때에는 자신의 사저를 국학의 문묘로 조정에 헌납했다. 뿐만 아니라, 봉급과 토지 및 노비마저 국학의 진흥을 위하여 나라에 바쳤다. 국가의 학문 부흥을 위해 개인의 모든 재산을 기부한 것이다. 아무리 학문 부흥이라지만, 얼마나 절박했으면 한 개인의 모든 재산을, 거기에 봉급까지 포함하여 모두 다 털어 넣을 수 있단 말인가.
지도급 인사의 책무는 인재 양성환갑을 넘긴 안향의 활동은 그의 사명의식처럼 충실하다. 61세 되던 해, 그는 한국교육사에서도 중요한 지위를 점하는 국학의 섬학전(贍學錢) 설치와 양현고를 충당했다. 섬학전과 양현고는 일종의 장학기금에 해당한다. 당시 국고가 바닥에 날 지경에 이르자, 그의 처절하고 눈물겨운 학문 진흥책이 ‘증보문헌비고-학교고’에 기록되어 있다.
“충렬왕 30년 5월 찬성사(贊成事) 안향이 국학을 보조하기 위해 섬학전을 넉넉하게 할 것을 건의했다. 안향은 학교가 날로 쇠퇴함을 근심하여 양부(兩府)에 다음과 같이 문제를 제기했다. ‘재상의 직책은 인재를 교육하는 것보다 우선 할 것이 없습니다. 지금 양현고가 바닥이 나서 훌륭한 인재를 기를 자본이 없습니다. 청컨대, 여러 관료 신하들에게 은이나 포를 관료의 등급에 따라 차등 있게 내도록 하여 섬학의 자본으로 삼으십시오.’ 그러자 왕도 내고(內庫)의 재물을 내어서 도왔다. 그런데 밀직(密直) 고세가 자신은 무인이라고 하면서 돈 내기를 반겨하지 않았다. 그러자 안향은 이렇게 꾸짖었다. ‘공자(유학)의 도는 온 세상에 모범이 되었다. 신하가 임금에게 충성하고,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 이런 훌륭한 인륜이 누구의 가르침인가? 만약에 나는 무인인데 생도를 기르는 데 구태여 돈을 낼 필요가 있느냐라고 말한다면, 이는 공자를 무시하는 짓이다. 그게 옳은 행동인가?’ 고세가 이 말을 듣고 부끄러워하며 바로 돈을 냈다. 그리고 안향은 남은 재물을 박사 김문정에게 주고 그를 중국에 보내어 선성(先聖)과 70자상(七十子像)을 그려오고, 제기(祭器)․악기(樂器)․육경(六經)․제자(諸子)․사(史) 등을 구해 오게 했다. 그리고 이산․이진 등을 천거해 경사교수사(經史敎授使)를 삼았다. 그렇게 하자, 국학의 7재와 사학 12도의 학생이 경을 가지고 수업하는 자가 수백을 헤아렸다.”
환갑을 넘긴 국가 원로의 꿈은 간절했다. 학문을 부흥하여 국가를 건강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것이 “재상의 직책은 인재를 교육하는 것보다 시급한 것이 없다”라는 호소로 나타났다. 국가 지도자급 인사들은 국가의 인재를 충실히 길러 내어 국가를 튼튼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현대적 의미에서 국력의 내실화와 경쟁력의 강화이다. 나아가 그는 국학박사를 중국에 파견해, 유학 관련 서적, 특히 주자신서(朱子新書)와 예 의식에 소용되는 물품을 구입함으로써 유학 교육의 발판을 마련했다.
비현실적 사상 비판한 교육지도자안향이 62세 되던 해, 국학의 대성전이 준공되었다. 이에 국학은 시설 측면에서 어느 정도 정비됐다. 이제 국가 최고의 교육기관이자 인재 양성의 산실로서 국학은 새로운 교육을 꿈꿀 수 있게 됐다. 안향은 이산·이진 등을 시켜서 주자의 성리학 교육을 체계적으로 시행했다.
지금 우리에게 남아 있는 안향의 글은 아주 적다. 그러나 거의 유일하고도 핵심적인 글이라고도 볼 수 있는 있는 ‘국자학의 여러 학생에게 일러주는 글(諭國子諸生)’을 보면, 그의 학문에 대한 성향과 애착을 확인할 수 있다.
“성인의 도는 일상생활의 윤리에 불과하다. 자식은 마땅히 효도하고, 신하는 마땅히 충성하며, 예로 집안을 바로잡고, 신의로 벗을 사귀며, 자신을 수양할 때는 반드시 경(敬)으로 해야 하고, 사업을 일으켜 세우는 데는 반드시 성(誠)으로 해야만 한다. 저 불교는 부모를 버리고 출가하여 인륜을 무시하고 의리에 역행하니, 일종의 오랑캐 무리다. 근래에 전란의 여파로 학교가 파괴되어 유학을 배우려는 학자는 배울 바를 모르고,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불경을 즐겨 읽어서 그 아득하고 공허한 교리를 신봉하니 나는 이를 매우 슬퍼한다. 내 일찍이 중국에서 주자의 저술을 보니 성인의 도를 밝히고 있다. 선불교를 배척한 주자의 공로는 공자와 짝할 만하다. 공자의 도를 배우려면 먼저 주자를 배우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 여러 학생은 주자의 새로운 서적을 돌려가면서 읽고 배우기를 힘써 소홀하지 말라.”
안향은 유학, 특히 주자 성리학의 핵심을 압축적으로 설명하고, 일상의 삶에서 벗어난 불교와 당시 사상계에 대해 비판했다. 그리고 고려를 부흥하기 위한 학문적 장려책으로, 공자 이후 유학의 도통을 주자로 확정하고 주자학의 연구를 권면했다. 그것은 인간의 삶에서 현실적 인륜의 확립을 도모하는 일이었다.
안향은 일생을 통해 교육지도자로서 국가의 학문 부흥을 꿈꾸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헌신했다. 국가의 인재 양성을 위해 교육지도자들이 나설 것을 권유했고, 교육 기관을 정비하며 국가의 건실함과 인간 삶의 질서를 도모했다. 당시 시대의 요청에 충실한 당연한 임무였음에도 겨레의 스승으로 돋보이는 것은 왜일까? 그의 교육 실천성, 신실한 책무성이 아닐까? 안향의 공헌은 지금도 그의 고향 순흥의 ‘소수서원’에서 살아 움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