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히도 외부 요인에 의해 교실에서 교사의 목소리는 잠기고 말았다. 하지만 교사라면 잊지 않는다. 교사와 학생 모두가 가장 행복해야 마땅한 공간은 교실이라는 것을...
교사들은 교실을 좋아한다. 그들이 교사로서의 존재감을 분명해 느낄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교실에는 그 어느 삶의 현장에서도 맛볼 수 없는 생기가 흐른다. 교사라면 이 생기를 직감적으로 느끼게 된다. 교실 화단의 페튜니아 꽃 내음과 적당한 먼지 내음, 그리고 교실에서만 느낄 수 있는 사각의 공간감이 교사들을 이끌어낸다.
여기 교실에 교사들을 위한 무대가 펼쳐진다. 이곳 교실에 교사는 스스로를 한 사람의 연기자로 만든다. 자신이 지닌 것을 내보이고, 전달하고 그리고 쏟아 붓게 된다. 이곳은 그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교사와 학생들이 만나는 신성한 공간이 된다. 교사들은 학생들과 호흡하고, 대화하고 그리고 자신이 지닌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필자는 교무실에서 학생들을 격의 있게 대하는 편이다. 학생 개개인과는 다소 격의를 두는 게 옳다는 소신에서다. 그러면 교사와 학생으로서 교단과 교탁만큼의 거리감이 확보된다. 교사는 교사답고 학생은 학생다운 모습이 생긴다. 하지만 다수를 접하는 교실에서는 최대한 부드럽게 분위기를 풀어가며 학생들을 대하고자 노력한다. 그들이 하고 싶은 질문이나 의견을 스스럼없이 표할 수 있는 현장을 만들어 내고자 한다.
오늘의 교사를 생각해 보자. 그들은 참으로 많은 과제를 수행하는 초인, 슈퍼맨 그리고 슈퍼우먼들이다. 오늘날 우리의 교육 현실은 녹록치 않다. 이 현실에서 교사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참으로 많은 짐들을 부과 받고 있다. 담임으로서의 책무, 부서의 일원으로서의 업무 처리 능력, 교사로서의 연구 능력 그리고 지식 전달자로서의 수업 능력 - 교사들에게 이 모든 것들은 쉴 새 없이 다중적으로 부과되고 있다.
작년에는 교실에서의 수업과 더불어 전반적 교육 활동에 대한 평가가 도입 되었다. 교실에서의 수업 활동의 일거수일투족은 학생들에게 평가를 받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사들의 주체적인 교육 활동은 급격히 위축될 수밖에 없다. 주변의 동료 혹은 선후배 교사들을 보노라면 각자의 특장점이 드러난다. 누구는 입시 지도에, 누구는 수업 능력에 뛰어난 장점을 보인다. 누구는 끊임없는 연구 자세에 집중력을 보이고, 누구는 담임교사로서의 학급운영 능력과 보직교사로서 뛰어난 행정능력을 보인다. 이 모두는 수치로 계량화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성격을 지닌다. 그러기에 여러 면에서 볼 때, 평가 도입은 수치적 계량적 평가를 최소화하며 신중에 신중을 기했어야 했다.
다시 교실로 가 보자. 학생들과 교사들의 학교생활에는 여러 단계가 있을 것이다. 학교 교정, 교실, 강당, 체육관, 교무실, 식당, 자율 학습실, 특별활동 건물, 휴게실, 매점 등등. 물론 이중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는 교실이다. 교실이 살아야 학교가 산다. 학교가 살아야 교육이 산다. 교육이 살아야 우리나라의 미래가 산다.
그런데 오늘날 교실에서는 교사와 학생 목소리가 사라지고 있다. 특히 교육 행위의 주체여야 할 교사들의 목소리는 교실에서 잘 들리지 않는다. 엇박자를 놓은 학생들의 목소리를 따라가느라 교사들은 진땀을 흘린다. 이 가운데 오로지 교실 밖 목소리만이 득세하고 있다. 수 없는 전자공문으로 밀어붙이기에 진력하는 교육청, 이론으로 들이대는 교육학자, 학교를 무시하는 언동을 일삼는 학원 강사들, 이상론으로 학교를 압박하기에 급급한 시민단체, 병 주었다 약 주었다를 반복하는 언론사 교육 기자들-그들의 목소리만이 크게 교실 바깥에서 메아리치고 있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결국 교사가 가장 활기찬 모습으로 활동을 해내야 할 공간은 다름 아닌 교실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오늘날 이 교실이 죽어가고 있다. 외부 요인에 의해 교사와 교실의 역할이 급격히 바뀌면서, 교실이라는 현장에서 교사의 목소리는 잠기고 말았다.
하지만 교사라면 잊지 않는다. 교사와 학생 모두가 가장 행복해야 마땅한 공간은 결국 교실이라는 것을. 교사는 교실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