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나라 일본이 유례없는 재난으로 신음하고 있다. 대지진이 땅의 지축을 흔들어 놓았고 쓰나미가 마을을 휩쓸어 갔으며, 원전까지 폭발해 방사능 공포가 엄습하고 있다. 가히 삼중고다. 이 세 겹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이웃나라를 과연 외면할 수 있는가. 누가, 어떻게 외면할 수 있겠는가.
그들의 얼굴을 보라. 비록 그들이 대성통곡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악을 쓰며 울부짖고 있는 것도 아니나, 그들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하고, 그들의 표정엔 두려움이 드리워져 있다. 엄마와 딸이 헤어졌고 남편과 아내가 생과 사를 두고 갈라섰다. 폐허가 된 마을엔 사라져간 사람들의 행방을 묻는 애끓는 쪽지들만이 그득하다. 무기력한 현실 앞에 오직 기적만을 바라며 망연자실해 있는 그들의 모습이야말로 두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참혹한 광경이 아닌가.
지금 일본은 기도하는 심정으로 간절히 부르짖고 있다. 하늘을 향해, 땅을 향해, 바다를 향해 두발로 서게 해달라며 부르짖고 있다. 그들이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자신들을 붙들어 달라고 내미는 손이 보이지 않는가. 우리야말로 그들이 부르짖는 소리를 귀담아 들어주는 응답자가 되어야 하고 그들이 내미는 손길을 잡아주는 도우미가 되어야 하며, 슬피 우는 그들을 위로해주는 위로자가 되어야 한다. 그들의 소리를 들어주지 않고 그들을 위로하지 않으며 그들이 내미는 손을 붙잡아주지 않으면 필경 그들은 실의에 빠져 쓰러지게 되리라.
어려울 때 도와주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고 하지 않았던가. 마찬가지로 어려울 때 따뜻한 위로와 도움을 줄 수 있어야 진정한 이웃이다. 가까운 곳에서 고통받는 이웃을 불문곡직 도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어야 할 까닭도 여기서 발견한다. 바로 그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도리고 또 우정을 나누게 되는 친구의 도리일 터이다. 대재난으로 고통받고 있는 그들의 눈에서 하염없이 흐르고 있는 눈물처럼, 말없이 우리를 향해 호소하는 것도 없다. 사람들은 길가에서 깔깔거리며 웃고 있는 어린아이들 곁은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칠 수 있다. 하지만 길에서 울고 있는 어린아이들 곁은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왜 그런가. 그들의 울음소리가 사람들의 발을 붙들기 때문이다. 울음에는 웃음에는 없는 도덕적 호소력이 존재하고 있어 외면할 수 없는 이유다. 그래서 지금 현해탄 건너 “힘들다”, “도와달라”, “살려달라”, “물을 달라”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대해 우리는 외면할 수 없다.
바이블에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는 길에 강도를 맞아 쓰러져 있는 행인에 관한 이야기다. 중상을 입어 쓰러져 있는 그의 곁을 여러 사람들이 지나간다. 종교인도 지나가고 학자도 지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한결같이 쓰러져 있는 사람의 고통에 무심했다. 갈 길이 너무나 바빴는지 모른다. 오직 한 사람, 사마리아인이 그를 보살폈다. 그를 업고 병원까지 간 것이다. 그리고 치료비까지 부담했다. 그에겐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기고통처럼 생각하는 뛰어난 공감능력이 있었고 자신의 편안한 처지와 그의 불쌍한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는 놀라운 역지사지능력이 있었다.
우리는 누구처럼 행동해야 하는가. 고통받은 사람의 곁을 무심코 지나갔던 랍비나 율법학자처럼 행동해야 하는가, 아니면 고통에 공감하며 역지사지했던 사마리아인처럼 행동해야 하는가. 답변은 자명하다.
혹시 묻는다. “일본은 가깝다기보다는 먼 나라가 아니냐”고. 또 묻는 사람이 있다. “과거에 일본이 잘못한 게 있는데 사죄도 없으니 어떻게 하느냐”고. 물론 그런 질문은 이상한 것이 아니며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질문을 할 때가 아니다. 매사에는 때가 있는 법이다. 낙석에 맞아 누워있는 사람에게 과거에 진 빚을 갚으라는 이야기를 꺼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빚 이야기가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빚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현재 이웃이 형언하기 어려운 고통을 받고 있는데, 왜 과거에 내게 고통을 줬느냐고 물어서는 안 된다. 이웃에게 과거의 잘못을 묻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때를 분별하지 못한 것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과거사는 과거사고, 휴머니즘은 휴머니즘이 아니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고 했던 성철스님의 화두가 새삼 떠오른다. 산과 물을 섞어서도 안 되지만 물과 산을 혼동해서도 안 된다. 과거사와 휴머니즘을 섞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과거사의 굴레에 묶여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면 역사의 새로운 악연을 만들게 된다. 우리는 이웃의 아픔을 위로하는 착한 이웃이 되고 그를 돕는 착한 사마리아인이 됨으로써 ‘선린(善隣)의 역사’를 시작하는 주인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웃을 돕는 마음으로 일본에 따뜻한 도움의 손길을 내밀 때다. 이번 일본의 대지진이야말로 우리에게 공감 능력이 있는지, 역지사지 능력이 있는지 묻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류애와 도덕적 감수성까지 시험하고 있다. 우리 모두 떨쳐 일어나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의 손을 잡아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