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교는 매년 4월의 첫 주 24명의 교생 선생님들을 맞아 교생 실습을 시작한다. 올해도 교생 선생님들을 맞이했는데, 전원 여자 교생들이다. 필자는 이 점과 연관해 기회 있을 때마다 학교 당국에 건의하곤 했다. 남자들도 교생 실습 등록을 받자는 것이다. 학교의 대답은 간결하다. 안 될 일이야 전혀 없지만 관례상 여자 교생을 받아 온 데다, 관례를 바꾸려 해도 요즘 남자 교생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이다.
참 무색해진다. 일이 이리 되면 논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왜 이런 교직의 강한 여초(女超) 현상이 일어났을까. 갈수록 여성들에게 교직은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는가 싶다. 직업에 있어서 성적 차별이 없고(사실상 심심찮게 남교사가 역차별을 당하기도 한다), 안정적 느낌을 주기 때문인가 한다.
근 4년여 간 본교도 남교사를 거의 선발하지 못했다. 남성의 경우 여성에 비해 응시율도 저조하며, 전형 과정의 비교 경쟁력 측면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한다. 사범대학의 여초 현상은 갈수록 심화되는 데다, 비사범대의 경우에도 남성들은 여성에 밀려 교직 이수 조건을 갖출 기회조차도 요원하단다. 게다가 군 입대니 제대 후 복학이니 하며 덤벙대다 보면, 집중력 측면에서 여성들의 상대가 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고 임용시험을 통과하는 숫자도 현격하게 줄고 있다.
80년대 후반 본교에 임용될 당시, 본교엔 참으로 많은 남교사 선배들이 있었다. 난 그들을 통해 많은 삶의 위로와 충고 그리고 교육의 지혜를 얻었다. 이제 더 이상 학교에서 나의 연상 선배를 찾기가 어렵다.
필자의 선배들은 김대중 정권의 정년 단축 이래 명예퇴직이라는 명분에 밀려 많이들 교직을 떠났다. 이제 50대 중반도 되지 않은 내게, 학교에 남은 남자 선배 교사들은 단 4명뿐이다. 실정이 이리 되니, 교육적 담론과 삶의 정황을 나눌 멘토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실정이다.
하지만 남은 문제는 교단의 여풍(女風)이 초래할 향후 교육 현장의 미래이다. 초등학교의 경우, 남교사들은 천연 기념물이 된지가 오래다. 이는 초등 남학생들은 교사를 통해 성적 모범을 찾지가 불가능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통계청에 따르면 1997년 이전, 유·초·중등 교원의 비율에 있어 남교원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많았다. 하지만 이 해를 경계로 교단의 남녀 비율은 역전됐다. 2010년을 기준으로 여교원 비율이 66%로 남교원에 비해 많고, 특히 초등학교의 경우 75%로 3배가량 우위에 있다. 교직에서의 지나친 여초 현상은 향후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가능성이 크다.
잠깐 화제를 돌려 보자. 남녀는 어쨌든 생득적(生得的)으로 분명히 다른 존재이다. 우선 남녀 간의 뇌의 구조가 다르다. 또 분명한 것은 남녀의 성적 차이가 존재하기 마련이라는 사실이다. 사실상 교육 현장에서조차 남녀의 생래적(生來的) 특성과 능력을 알아내고 존중하는 일이 더 필요하다. 이를 바탕으로 교단의 교사 간에도 적절한 남녀의 역할 분담을 함으로써 자기 충족을 도모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교육 평등을 실현하는 길이다.
이런 측면에서 양성평등고용제와 같은 고용촉진에 관한 기준을 새로이 점검할 필요가 있다. 무조건 남성들에게 분발을 바라기에는 오늘날 교단의 여풍은 너무도 강하고 격하다. 이제 남교사할당제를 실시해도 좋을 시기인 것 같다. 교단의 적정한 성비 균형은 학생들에게 남녀의 성적 차이를 수용하고, 다양한 성적 역할의 모범을 주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상술한 필자의 여러 언급들이 마초적 발상으로 간과되지 않았으면 한다. 여튼 실습을 받는 42명의 교생 선생들을 바라보며, 80년대 후반 한 공립 중학교에서 교생 실습을 받던 일들이 생각난다. 의욕과 열정 그리고 치기가 혼합이 되었던 젊은 시절이었다. 당시의 그 학교는 남녀 교사들의 비율이 거의 엇비슷했다. 이제 교직 희망의 남성들이 좀 더 분발하고, 교육 당국은 임용에 있어 제도적인 보완을 해야 할 시점이다. 이 점에서 학생들이 남녀 교사들을 고루 접하면서 성적 역할의 다양성과 그 긍정적 차이를 이해할 수 있는 교육 현장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