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교육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 학교 현장에서 특강을 하며 훈수를 두는가 하면, 각종 언론에 등장해서 현장 교사들의 나태함을 질타하는 일조차도 생겨난다. 필자의 학교는 지역적으로 사교육이 성행한다는 강남의 대치동과 도곡동에 위치해 있어, 여러 형태의 사교육과 사교육 강사들의 행태를 목격한 바 있다.
필자가 20대 후반의 초임 시절, 당시도 사교육의 문제는 하나의 화두였다. 하지만 지금처럼 사교육 업체들이 교육의 전면에 나서서 설쳐대진 않았다. 일테면 ‘교육에 대한 예의’는 살아 있던 시절이었다. 오늘날의 실용성을 강조하는 현 정권의 교육 정책은 동일 잣대를 들어 공교육 교사가 사교육 강사와 경쟁하기를 요구한다.
주지하다시피 우리 교육이 안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는 교육 정책이 정치 논리에 휘둘린다는 점이다. 정권이 바뀌면 교육의 근간이 뿌리째 흔들린다. 전임 정권이 추진하던 교육 정책은 용도 폐기된다. 정권에 따라 평준화와 수월성의 교육 지침이 달라지고, 입시 제도는 크게 요동친다. 여기에 시도교육감의 이념에 따라 ‘국가수준 학업 성취도 평가’와 같은 행정은 강화냐, 폐지냐 하는 극단적인 줄타기를 하기도 한다. 물론 정권이 교체되면 동일하게 들고 나오는 일도 있다. EBS를 통한 공교육 강화와 수능 반영 - 이는 완벽한 데자뷰이다.
일단 중요한 전제를 먼저 하자. 교사들은 인격을 교육하고, 학원 강사들은 지식을 상행위한다. 인격은 지식과 사색을 요구하며 인간과 세계에 대한 성찰을 통해 완성된다. 그러기에 공교육과 사교육의 연합 혹은 타협이란 있을 수 없다. 교육 행위의 전제가 다르며 과정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공교육의 기능상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사교육이 보완하는 일은 있을 수 있다. 그건 그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우리 사회에서 사교육은 이미 타란툴라(tarantulla·독성을 가진 거미)의 맹독이 되었다. 그리하여 학부모와 학생들의 의식조차도 마비시켜 ‘해독의 춤’ 타란텔라(tarantella·타란튜라에 물리면 이 춤을 추게 된다는 설이 있다)를 출 기력조차도 없게 만들었다. 사교육 기관은 학교 교육을 앞질러 선행 학습을 하고, 학습의 목표와 방향을 정하는 진도 학습을 하고 있다. 사교육의 기반은 속도이다. 학생 각자의 부족 부분에 대한 보완을 뛰어넘는 광속으로 우리 사회를 질주하고 있다.
사교육 존재의 비밀은 학생과 학부모들의 심리를 이용하는 불안 마케팅이다. 극대화된 상업성은 ‘당신과 당신의 자녀만 뒤처집니다’는 언급을 반복 주입하고 있다. 아울러 ‘반복의 쇠고리’를 흔들어 상대를 ‘파블로프의 개’로 훈련시킨다. 사교육의 선행 학습을 좇다 공교육의 진도 학습을 놓친다 해서 다시 사교육 보충 학습을 받고, 이어 선행 학습을 쫒는다. 이러한 반복의 비밀은 학생으로 하여금 결국 주체적으로 자기 주도적으로 학습할 기회를 잃게 만드는 일이다. 이들 학생과 학부모들은 사교육의 영원한 ‘밥’이다.
각 정권이 사교육 문제에 있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EBS 활용도 독소적 요소가 많다. 이미 EBS는 거대한 권력 기관이다. 공권력을 등에 업고 사교육 기관보다 더한 영업 행태를 보인다. 영업 노하우는 ‘땅 짚고 헤엄치기’이다. 50만이 넘는 전국의 입시생들은 수능 반영이라는 덫에 걸려 ‘울며 겨자 먹기’로 EBS 교재로 공부하게 된다. 옵션은 없다.
이 지면에 감히 사교육 대책을 운위할 계제는 아니다. 다만 그 단초는 분명히 안다. 일단 현장 교사들이 지닌 지나친 수업 시놉시스와 행정 업무로부터의 부담이 반드시 경감되어야 한다. 수업력에 대한 평가에 앞서 이러한 시스템적인 측면의 개선이 선행되어야 한다.
아울러 정권은 사교육 문제를 EBS에게 전가하질 말아야 한다. 당장 EBS를 입시 주도적인 역할에서 손을 떼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평생 교육이나 교양 제작과 같은 방송 설립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문제는 기본을 확립하려는 시대적 태도이다. 모두가 대학으로 달려가는 비능률과 학벌을 쫒는 시대 기류는 반드시 개선되어야 한다. 다행인 것은 21C의 시대적 격변을 거치며 우리 사회의 변화 흐름도 감지되고 있다. 학벌이나 간판을 우선시하는 풍조에서 개인의 개성과 능력에 대한 존중 그리고 창조적 잠재성으로의 전환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교육의 미래는 아직 가망이 있다. 그때까지 교육과 연관한 우리 모두는 ‘근본이 확립이 되면 가야 할 길이 생겨난다’는 이 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