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우야, 일단 선생님이 미안하다는 말부터 전하고 시작할게. 앞으로는 절대 그런 실수 안 할 거야. 해가 갈수록 수업 진행이 마음먹은 것처럼 쉽지 않구나. 럭비공 튀듯 돌출 행동을 하는 녀석이 있는 학급은 수업 분위기 잡기도 어렵고 수업 시간 내내 주의를 주는 게 다반사니 열심히 하는 학생들까지 피해를 받게 마련이지. 그런데 상우가 있는 학급은 그런 학생들은 없고 오히려 상우가 학습 분위기를 주도하니 항상 수업에 생동감이 넘친단다. 아이들이 나태해지려 하면 “얘들아, 선생님 말씀 잘 듣자”라며 독려하는 말까지 하는 너는 나한테는 보물단지나 다름없어.
상우는 자연계라서 수학, 과학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할 텐데 보충수업 시간에도 내 과목(국어)을 신청해서 듣지. 고마울 따름이란다. 8교시 수업이라 학생들도 지칠 만큼 지쳐 있고 발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아 지도하는 나도 힘들고 애를 먹는단다. 그때마다 상우가 손을 들고 “선생님, 제가 발표하겠습니다”라고 자청해서 수업에 생기를 불어넣지.
그러던 어느 날, 보충수업에서 비교적 어려운 문제를 풀 차례인데 발표할 학생을 묻자 아무도 나서지 않았지. 그동안 그런 어색함을 메워주며 매번 발표에 나섰던 상우조차 자신 없는 눈치였어. 하는 수 없이 분위기 전환을 위해 상우를 시켜야겠다고 생각하고 “그래, 발표할 사람이 없으면 상수가 발표해 볼까?”라고 말을 꺼냈고 그러자마자 항상 밝은 웃음을 머금고 있던 너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지. 다른 아이들도 의외라는 듯 상우를 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단다.
순간 한 학생이 “선생님, 상수가 아니라 상우예요”라고 외쳤어. 순간, 마음속으로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지고 말았지. 너는 마음이 상한 듯, “선생님, 저 상수가 아니라 상우예요. 이름 정확히 불러주세요!”라고 했어. 삐쳐도 단단히 삐친 듯했어.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수업은 드라이아이스처럼 급속히 냉각됐음은 물론이고.
평소에는 그렇게 잘도 불렀는데 갑자기 상수라고 부른 이유를 나도 알 수가 없어. 지금 2학년 학생들은 솔직히 이름 부르기가 쉽지 않아. 교복 상의에 이름을 표시하는 것 자체가 인권 침해의 요소가 있다는 이유로 교복에 이름을 새기는 대신 목에 거는 명찰표로 대신했거든. 그런데 아이들이 이름표를 목에 거는 것 자체를 번거로워하니 도무지 아이들 이름을 확인할 길이 없는 거야.
생김새가 비슷한 아이들 가운데 이름이 비슷한 아이는 정확하게 이름을 부르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란다. 그래서 혹시 잘못 부르면 아이가 상처를 받을까 봐 이름 대신에 두루뭉술하게 ‘야’라고 하거나 ‘너’라고 부르며 넘어가는 경우가 다반사지. 아이들 이름을 불러주는 것만큼 스승과 제자 사이의 관계를 긴밀하게 하는 방법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이 들어가면서 자꾸 흐려지는 기억력을 탓할 수밖에.
마음이 영 개운치 않았어. 그렇게 명랑하고 발표도 잘했던 녀석이 자신의 이름조차 정확히 부르지 않았던 선생님에 대해 실망하던 모습을 생각하니 안쓰럽기까지 했거든. 그래서 다음 수업 시간에는 꼭 상우의 마음을 달래주리라 다짐했지.
드디어 기다리던 보충수업 시간이 돌아왔어. 그날도 발표하라고 했을 때 모두가 묵묵부답이었어. 하는 수 없이 상우를 불렀어. “야, 한상우 선생님이 상우를 상수라고 불렀다고 삐쳤지?” 그러자 상우는 기다렸다는 듯 “아닌데요, 전 선생님께서 더 삐진 것 같은데요?” “녀석아, 내가 삐쳤으면 네게 물어봤겠니.” “선생님, 저 삐치지 않았어요. 선생님께서 처음에 이름을 엉뚱하게 부를 때는 서운했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선생님도 실수할 수 있잖아요.”
그랬다. 아이들과 친밀하지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이름을 부르는 것인데 내가 잘못 불러놓고 나 혼자 자격지심에 빠졌던 게다. 상우가 발표를 했다. 역시 전과 다름없이 정확한 근거를 들어 문제를 설명했고 답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했다. 아이들의 박수가 쏟아지며 다시 수업 분위기가 살아났다.
이름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 사람의 정체성이나 다름없다. 특히 청소년기의 아이들에게 있어서는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교육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교사의 소임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자주 불러주는 것이라고 했다. “상우야, 선생님 이번 일을 계기로 다시는 상수라고 부르는 일이 없도록 할게. 녀석, 그렇다고 선생님이 삐쳤다고까지 할 건 뭐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