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모들의 자식교육에 대한 욕망은 주거지역별 학부모들의 생활방식의 차이에도 잘 드러나고 있다. 어떤 동네에 사느냐에 따라 아이가 학교 간 사이의 생활방식과 학교 가서 공부하기 어렵다는 아이에게 해주는 말이 다르다는 웃지 못 할 유머가 있다.
예를 들어 압구정동 엄마들은 아이가 학교 가 있는 동안 쇼핑을 한다. 아이가 하교해서 공부가 어렵다고 하소연하면 “유학 가자!”고 한다. 서초동 엄마들은 아이가 학교 가면 문화생활을 즐기고, 아이가 공부를 어려워하면 “아빠가 가르쳐 주실꺼야”라고 한다. 서초동 아빠들은 법조인이 많기 때문이다. 분당 엄마들은 아이가 학교 가면 낮에 모임을 갖고, 아이가 하교해서 공부가 어렵다고 하면 “팀을 짜자”고 한다. 마지막으로 대치동 엄마들은 아이가 공부가 어렵다고 하소연하면 직접 공부해 가르치고, 아이가 학교 가면 낮잠을 잔다. 늦은 밤까지 학원에서 아이들을 실어 나르고 직접 공부해 가르치느라 피곤해서다.
대치동에는 그래서 사교육과 관련해서 새로운 용어들도 많다. ‘대치동 기러기’라는 말은 자녀 교육을 위해 부모 중 한명이 대치동에 거주하는 학부모를 지칭하는 말이다. ‘대치동 기러기’가 살아가는 방식을 '대전(大傳·대치동 전세)살이'라고 한다. 자녀들을 위해 대치동에 전세를 얻은 부모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뜻한다. 대치동 주변 학원 앞 카페는 소위 ‘카페맘'으로 북적인다. 이들은 어떤 학원이 어느 분야에 강한지를 인터넷에 올리는 '학부모 기자' 역할도 한다.
대치동 일대에 입성하기 위해 '기러기 가족'이 되는 길을 선택하거나 위장 전입까지 마다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대치동 학교들의 학업성취도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공부하는 목적은 무엇인지, 공부를 통해 닦아야 될 나의 인격과 품성은 무엇인지를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그저 높은 점수를 받아 좋은 대학 가고 대학에서는 좋은 회사에 취업하기 위한 스펙을 쌓으면 되는 것이다. 물음이 실종된 교육은 품질이 일정한 상품을 대량 생산하는 공장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교육(敎育)은 사육(飼育)일 수 있다. 사육은 가축을 오로지 빨리 키워서 상품가치를 높이는데 목적이 있다.
사육된 가축은 작은 전염병에도 쉽게 전염되어 죽을 수 있다. 사육된 가축이 자주 전염병에 걸리는 이유는 외부 충격을 견딜 내부적 DNA가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뛰어 놀지 못하고 오로지 앞만 보고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공부 선수들도 외부 시련과 역경을 견딜 내공이 없다. 작은 외부 충격에도 견디지 못하고 심각한 정신장애를 일으키거나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자살하는 사태도 발생한다.
한국 사회에서의 ‘평등’은 아파트 ‘평수’와 학교에서의 성적이 말해주는 ‘등수’의 합작품이라는 웃지 못 할 평등관이 있다. 이러한 평등관이 말해주듯이 학교 성적을 잘 받아 좋은 회사에 취업하고, 보다 빠른 시간 안에 돈을 벌어 넓은 평수의 아파트를 마련하는 게 행복이 넘치는 삶이라는 가정을 암묵적으로 강요당하고 있다. 행복은 공부 잘하는 사람만의 미덕이 아니라 자신이 하면 신나고 재미있는 일을 평생 즐겁게 하는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특권이다.
교육의 목적은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는데 있지 않다. 오히려 교육의 목적은 다양한 시행착오를 경험하고 우여곡절과 파란만장한 체험 속에서 스스로 깨달음을 얻도록 유도하는데 있다. 스스로 깨달은 진리라야 내 삶에 도움이 될 수 있고 오랫동안 빛을 발할 수 있다. 교육은 물음표의 곡선에서 감동의 느낌표를 찾는 여정과 함께 해야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매사를 속전속결로 처리하고 보다 빨리 더 많은 목표를 달성하려는 직선형 사회가 사람들의 마음도 급하게 만든다. 직선적 심리와 사고를 가진 직선형 인간이 직선형 삶을 추구하는 직선형 사회가 선호하는 성공에 대한 관점이 교육관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직선형 교육을 조장한다. 직선형 교육은 물음이 사라진 교육을 말한다. 우선 자신이 무엇이 되고 싶은지를 묻지 않는다. 직선형 교육은 내가 누구인지,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내가하면 신나는 일이 무엇인지와 같은 자기 탐색이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회의 기대와 학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거나 마지못해서 앞만 보고 달려가는 무한 경쟁지향적 교육을 말한다.
“언제부터인가 대학은 조금 큰 고교가 되고 말았다. 차이가 있다면 하나는 대학 들어가는 기술을 가르치는 학교, 하나는 회사 들어가는 기술을 가르치는 학교라는 것뿐이다. 그냥 고교를 7년제로 하면 될 것 같다”는 카피라이터 정철의 조소어린 비판을 그냥 흘려버릴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어떤 행복을 꿈꾸어 나는 경쟁하고 경쟁했는데 우리가 그린 미래는 드라마에 불과한 공상입니다. 일상의 무게로 비굴해진 나의 자존심도 용기도 버린 내일, 우리의 꿈은 서로 다르지 않은데 꿈을 위해 꿈을 버리고 어머니 당신은 알고 계시나요? 나는 이름도 없는 나사" 자우림의 노래 '나사(螺絲)'의 일부다. 꿈이 없는 교육, 꿈을 꾸지 않는 학생, 꿈의 소중함을 가르치지 않는 교육에는 미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