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저 진규(가명)에요. 오늘 찾아뵈려고 하는데, 전근 가신 학교가 어디에요?”
수업이 끝나고 잠시 쉬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낯익은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전해졌다. 아이의 얼굴과 함께 작고 앙증맞은 개망초 꽃이 떠올랐다. 작년 이맘때 즈음이었다. 새 학기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선생님, 큰일 났어요. 진규가 현일(가명)이와 화장실에서 치고 박고 싸우고 있어요.”
다급하게 교실로 뛰어온 우리 반 아이를 따라 화장실로 뛰어 갔다. 그곳에 내가 도착했을 때 현일이는 진규에게 맞아서 얼굴이 멍든 상태였고, 주먹을 불끈 쥔 진규의 눈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두 아이를 교실로 데려 와 자초지종을 들었다. 현일이가 진규를 부모도 없는 고아라고 놀리는 바람에 화가 난 진규가 현일이를 주먹으로 쳤던 것이다.
진규는 학기 초부터 말수가 적었다. 그날 처음으로 진규의 가정사를 들었다. 엄마는 집을 나간 지 오래됐고, 아빠는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날에는 진규를 힘들게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대화하는 내내 진규는 먼 산만 응시했다. 더 이상 학교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건 무의미하게 느껴져 진규와 함께 가까운 용왕산에 올랐다.
“진규야, 지금 진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묻지 않을게. 오늘 있었던 일도 현일이 어머니께 잘 말씀드렸더니, 네가 선생님 지도에 잘 따른다면 책임을 묻지 않기로 했단다.”
진규는 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고 먼발치만 응시할 뿐이었다. 근처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을 사 먹이고 몇 가지 당부의 말을 한 후 우리는 헤어졌다.
붉은 장미가 눈부신 빛을 뽐내던 6월의 어느 날 아침, 늘 그랬던 것처럼 동시조 창작활동을 했다. 글감을 선택해 단시조나 연시조로 동시조를 짓는 활동이었다. 아이들은 아는 어휘를 동원해 감수성 넘치는 시조를 지었다. 그 속에는 사춘기 아이들만의 고민과 갈등이 드러나 있었다. 작품을 검사하던 중 진규의 작품이 눈에 띄었다. 진규는 자신을 개망초에 비유했다.
“진규는 왜 개망초를 진규라고 생각해?”
진규는 다소 냉소적으로 대답했다.
“개망초는 세상 이곳저곳에 피어있어도 누구 하나 지켜보는 사람이 없고, 관심도 못 받지만 항상 자신이 있던 자리에 매년 피어나는 게 저랑 같아서요.”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고 스스로 혼자라고 생각하는 아이에게 어떤 말을 해줘야 할까, 순간 고민이 되었다.
“진규야, 이 세상에 피어나서 지는 꽃들이 남을 의식해서 피어나는 걸까?” “글쎄요.”
“선생님이 봤을 때는 이 세상에는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늘 한결같이 자기 자리에서 피어나는 야생화나 이름 없는 꽃들이 많단다. 이름은 인간이 그들을 구별하기 위해서 붙여준 것 일뿐이야. 그들에게 이름은 큰 의미가 없어. 꽃이나 잡초 중에 이름 없이 피었다 지는 꽃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니? 하지만 다음해에도 어김없이 그 자리에 피어나잖니. 우리도 마찬가지야. 누가 뭐라 해도,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우리 모두는 나름의 개성을 가진 소중한 존재란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진규는 말을 이어갔다.
“선생님, 저 방학 때 여수로 떠나는 기차여행 갈래요. 지금 신청해도 되나요?”
초등학교에서의 마지막 추억을 만들기 위해 지난 1학기 내내 반 아이들과 계획했던 여수행 기차여행에 진규가 가겠다고 했을 때, 나는 내심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우리는 영등포역에 모여 여수엑스포역행 기차에 올랐다. 가는 내내 아이들은 무척 즐거워했다. 여수엑스포역에 도착하자마자 숙소로 가 여장을 풀고 여수 밤바다를 구경하기 위해 해수욕장으로 나갔다. 깊은 밤, 유조선이 떠 있는 바다를 보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진규 옆으로 가서 기분이 어떤지 말을 건넸다.
“좋아요. 여기 오길 잘 한 것 같아요.”
여행 내내 말이 없던 진규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무척 즐거워 보였다. 얼굴에는 행복함이 역력했다. 이어지는 진규의 말에 나는 놀랐다. 2학기에 예정된 동시조 창작대회에 나가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순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조 창작대회는 학교 대표로 선발된 학생 2명이 나가는 대회였다. 지금까지 진규의 작품을 봤을 때 선발되기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용기를 주고 싶었다.
“그래 잘 생각했다. 학교 대표로 나가는 대회이니만큼 대회 전까지 열심히 연습해서 실력발휘를 해 보는 거야. 선생님은 진규가 누구보다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파이팅! 진규”
말을 끝내자마자 진규에게 하이파이브를 청했다. 진규는 강한 의지를 담은 힘찬 하이파이브로 답했다. 진규의 마음이 손으로 전해지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축구도 하고, 엑스포도 구경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서울로 돌아왔다.
한 달간의 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맞이했다. 조용했던 학교는 다시 활력을 찾았다. 동시조 창작대회가 다가왔다. 우리 반에서 학교 대표로 나갈 학생 2명 모두를 선발하기로 했다. 남학생 1명과 여학생 1명을 뽑기로 결정하고, 동시조 작품을 공모했다. 글감은 두 개로 제한하고 아침 동시조 창작활동 시간에 쓴 작품으로 평가하겠다고 아이들에게 전했다. 모두들 좋은 작품을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그런 아이들 사이에서 진규도 글쓰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말수가 적은 진규였지만, 2학기 들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창의적으로 표현하곤 했다.
아이들의 동시조 작품 가운데 다섯 작품을 1차로 선별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직접 우리 학교를 대표할 학생을 고르게 했다. 아이들은 칠판에 게시된 후보 작품에 스티커를 붙였다. 결과는 놀라웠다. 진규의 작품이 가장 많은 표를 얻었기 때문이다. 진규가 학교 대표로 뽑혔다는 소식을 전하자, 아이들은 진심으로 진규를 축하해줬다.
노란색과 붉은색 옷을 갈아입은 나무가 완연한 가을이 왔음을 알리던 대회 당일. 아침 일찍 대회 장소인 서교초로 모여드는 어린이들 사이로 진규의 모습이 보였다. 진규는 할머니와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진규를 대회장으로 안내했다. 글감은 대회장에서 발표됐다. 학생들은 학교 이곳저곳에 자리를 잡고 시심을 살려 동시조를 지었다.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결에 아이들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드디어 결과를 발표하는 시간이 돌아왔다. 장내는 숙연해졌다. 참방, 차하, 차상이 먼저 발표되었다. 시상식장은 입상한 학생들을 축하하는 박수소리로 가득 찼다. 진규와 함께 학교 대표에 선발된 여학생은 참방 상을 받았다. 하지만 진규의 이름은 호명되지 않았다. 진규의 얼굴에서 다소 실망스러운 기색이 보였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드디어 이 대회의 꽃인 장원을 발표하는 순간이 다가왔다.
“김진규.”
진규의 이름이 불렸고, 내 가슴은 요동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움츠려 있던 진규에게로 향했다. 큰 박수소리에 진규는 당황한 기색이었다. 멈칫멈칫, 시상대로 걸어 나가는 진규 뒤로 손주를 향해 대견하다는 듯 박수를 치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시상식이 끝난 후 진규와 할머니, 함께 참가한 여학생과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사진 속 진규는 부끄러움 많은, 사춘기 소년이었다. 기뻐하는 진규에게 다가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라고 질문했다. 진규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훌륭한 시인이 되고 싶다”고 대답했다. 초롱초롱하게 빛나던 진규의 눈빛은 개망초와 닮아 있었다. 학교에 돌아온 진규는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상을 전달 받았고,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문학 소년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로 반 아이들은 진규를 문학 소년으로 인정해줬고, 늘 그 주변에는 친구들이 끊이지 않았다.
개망초는 혼자 피지 않는다. 다른 이들이 눈여겨보지 않아도 늘 같은 자리에서 주변을 화사하게 밝히는 하얀 빛을 내뿜으며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진규도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의 자리에서 홀로 설 수 있다는 걸 우리 모두에게 보여줬다.
진규가 오면 꽃집에 들러 진규가 좋아하는 야생화를 선물로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