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생들이 시위로 거리를 나서게 된 것은 한국 역사상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것의 정당성을 인정받은 것은 몇 번이나 될까?
조국이 풍전등하의 기로에 서 있을 1929년 11월 3일 전라도 광주에서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항일투쟁운동을 일으켰다. 그 결과 전국적인 학생운동으로 파급되었고, 1919년 3ㆍ1운동 이후, 젊은 학생들의 항일독립정신이 분출된 격렬하고 힘찬 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부마사태와 5.18 광주민주화 운동에서도 일부 고교생들이 거리로 나서게 되었지만 그 가치를 평가받기에는 이직도 시간이 필요하다.
고교생이 거리로 나서야만 하는 오늘의 교육 풍토는 어디에서 국한된 것일까. 아직도 사물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이 불분명하고 삶의 체험이 부족한 학생들이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고자 거리로 나서야만 하는 것인지 되뇌어 보아야 한다. 기성세대들이 만들어 놓은 그릇된 시위 문화의 흉내를 본받아 집단 이기주의 형식만 취하면 된다는 단편적인 사고의 틀이 신세대들에게 주입되어 있다면 이는 오늘의 우리 사회의 여론 형성 과정에 모순이 있음을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
댓글이 봇물처럼 이루어 여론을 주도해 나가던 이들의 열정은 어느 새 거리의 문화로 나타나게 되었는지 앞뒤를 종잡을 수 없게 한다. 21세기라는 첨단 기계의 영향이 세계를 움직이는 시점에서 여론의 형성은 얼마든지 기성세대에게 자신들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돼 있다.
20대에는 혁명가와 같은 기백이 넘쳐야 하고, 30대에는 조용히 현실에 돌아와 발맞추어 살아가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순리라고 혹자는 말했다. 한국의 학생들이 역사에서 한 큰일은 오늘의 시점에서 되돌아 봐도 많다. 하지만 그들이 한 일들이 모두 옳다는 것은 아니다. 일을 추진하다 보면 잘잘못은 있기 마련이지만, 젊음의 혈기를 지나치게 투쟁위주로 이끌어 온 그 밑바탕은 현실의 시위문화가 투쟁과 저항만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길이라는 여정을 만들어 놓았다는 점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학생의 신분으로 조국의 핵심적인 일을 앞장서서 나가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인간의 삶에는 질서가 있고, 계층이 있다. 기성세대들은 그것을 몰라서 뒷짐 지고 방관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이가 들고 경륜이 많을수록 신중해지기 마련이고, 사리를 판단하는 것이 발산적 사고와 확산적 사고의 틀 속에서 신중해지기 마련이다.
거리에서 어린 학생들이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겠다고 하는 핵심은 무엇인가. 무조건 반대, 뭉치면 된다는 생각. 이것이 문제일 수 있다. 하지만 교육인적자원부도 졸속행정이 문제가 됨을 바로 인식해야 한다. 하나의 사안을 시행하려면 워밍업이 있어야 한다. 수학의 공식을 풀어 가듯이, 인간의 사고를 꿰어 맞출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수없이 반복되는 교육행정의 되풀이되는 모순이 왜 시정되어지지 않는지. 그것이 의심스러울 뿐이다.
한국인의 특징 중에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조급성이라 한다. 조급성이 심하기에 자기 업적 내세우기에도 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 식이다. 업적 위주의 자기 실적 쌓기가 누구를 위한 업적인지가 교육 현장에서 느끼는 감도는 회의적이기만 하다. 진정한 업적이 하루아침에 쌓여질 일이였다면 그 누구 위대한 업적을 남기지 않을 리 있겠는가. 교육부 장관이 쉽게 쉽게 바뀌어 가는 현실을 보면서 가슴 아프게 느껴지는 한국 교육의 진면목은 어디에서 꽃필 것인지 곰곰이 되새겨 보게 된다.
정치는 항간의 모습을 살피고, 교육 실무자들은 학당에서 일어나는 자잘한 일거리를 e-리포트의 목소리에서 살피는 넓은 눈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거리를 학당으로 여기는 오늘의 교육풍토는 지도자의 변혁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그리고 학벌제일주의가 만들어 낸 비극의 결과물이 바로 학생들의 거리 행진으로 나타난 것이다. 우수한 인재를 길러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수한 인재가 이 사회에서 다른 이의 고충을 덜어주는 역할을 할 때, 밝고 맑은 사회는 탄생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결과는 교육의 산물이 투입과 산출이 바로 창출될 때 프리즘처럼 발산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