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는 가까운 현장에서 교육정책을 실행한다. 정책 당국은 현장과 떨어진 먼 위치에서 현장을 내려다본다. 야누스의 두 얼굴처럼 정책이 얽히고설킨 오늘의 교육정책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혼돈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 학생은 자율이 아닌 자유를, 학부모는 학교와 교사의 흠을 보는데 연연해하는 것처럼 투서를 올리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듯 공개하기도 하고, 교육청에서는 상급기관의 공문전달을 헌신이라도 하듯 일선 학교에 내려 보낸다. 교육부는 지역교육청과의 조화가 맞지 않아 삐걱거리는 소리가 할머니의 한숨소리와 같이 들린다. 학생을 지도하는 현장 교사들은 학생 지도를 어떻게 해야 할 지, 어디에다 의지해야할지, 황야의 야생마처럼 으르렁거리고 있는 모습이 마치 한편의 공상과학 드라마를 연상하게 하는 것 같다. 시대가 바뀌었다. 그러니 교사가 변해야 한다. 그리고 학교가 교육과정을 현실에 맞게 만들어야 한다. 등등 참으로 요란한 소리의 메아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다. 사교육과 공교육의 조화를 어떻게 발맞추어 나갈 것인가도 문제다. 학교가 학생의 사교육을 막을 길이 없는 현실에서 사교육에 대한 궁극적인 대안이 필요하다. 현실적으로 대수능 예비시험을 보는 전국 고등
학교의 교사! 할 일은 많은데 진정 중요한 일에는 신경을 쓸 틈이 부족하다. 정규 교과 시간을 마치면 또 보충수업을 해야 하지, 그리고 자율학습이 이어지니 정말 온종일 쉴 틈이 없는 것이다. 학부모와 상담을 하고 싶어도 쉬는 시간을 이용하든지, 정규 교과 시간 외에 귀가하지 않고 남아서 야간에 해야 한다. 수업 중 학생이 잘못하여 상담하게 되면 수업권 침해라고 야단이다. 그러니 학교 수업에 대한 연구는 시간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귀가하여도 교재를 보아야 한다. 베테랑 교사라도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자주 책을 펼쳐야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요즘 학교 수업을 소홀하게 하면 상황이 그리 녹녹치 않다. 그러기에 교사는 학교에서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많아지기 마련이고 건강에도 많은 이상이 올 수도 있다. 때문에 교사는 건강관리를 위해서라도 운동을 꾸준히 해야만 한다. 성대결절 및 하지정맥류가 공무상 재해로 인정되지 않고 있어 안타깝기도 하다. 교단에서 하루 3-4시간 수업을 한다고 하지만, 그 시간이 그리 만만치가 않다. 다른 업무가 없으면 모르겠으나 연속되는 학급업무는 교사를 중노동으로 몰아부칠 때가 많다. 어떤 교사의 목소리는 가까이서 들으면 잘 들리지 않고
아이의 돌잡이! 인친척과 지인들이 모인자리에서 초미의 관심거리로 아이가 무엇을 잡느냐를 모두들 쳐다본다. 그것은 아이의 첫 선택이 장래 직업을 상징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언제부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한글을 다 마스터하고 학교에 가야만 한다는 부모님의 좌불안석이 학생의 학업에 대한 과열로 이어지기 시작하였다. 먹고 살 만한 시대로 접어들게 되자 너네 할 것 없이 학업에 대한 높은 관심을 쏟아넣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 3대 천치라는 우리 사회의 닉넴임이 유행어처럼 따라 다녔던 시기가 있었다. 중학교를 나와도 한글을 모르고, 고등학교를 나와도 한문을 모르고, 대학을 나와도 영어를 모른다는 웃지 못할 유행어가 우리를 슬프게 했다. 그렇다. 지금이라고 별 다를 게 없다. 한문을 모르는 것은 고사하고 자기 이름조차도 한문으로 쓸 줄 모르는 학생이 비일비재하다. 심지어는 자기집 주소도 모르고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어느 하나를 가지고 학생을 평가할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우리의 교육의 허상을 차근차근 살펴보면 그것이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많은 점수만 받으면 제일이라는 부모들의 허욕이 아이로 하여금 공부 외 아무것도 몰라도 되니 1등만 하
회초리 금지, 비속어 금지, 때리는 시늉만 해도 폭력, 얼차려(군에서 사용되는 비폭력적인 벌)금지 등등. 참으로 학교의 학생지도가 완전 이상적 민주주의식이라고 생각할 정도다. 진정 민주적인 교육은 체벌이 없이 말로만 지도하는 것이 민주적일까? 민주주의 의미는 넓은 의미에서는 각 나라마다 사용하는 개념은 동일하다. 그러나 민주주의 교육은 그 나라의 풍토와 역사에 따라 달라지고 있다. 일본의 교육은 군국주의 교육이라고 한다. 우리의 교육은 유교를 바탕으로 한 미국식 자유주의 교육이 이식된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외침을 많이 받은 우리의 교육은 그 틀을 바로잡아 우리의 것으로 만들기에는 많은 시련이 필요했다. 우리식 민주주의 정치가 시작된지 얼마나 되었는가? 80년대 민주주의 붐은 군인정치를 종식시키고 등장했다. 따지고 보면 우리식 민주주의 교육은 20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 뿌리가 튼튼하지 못하기에 국정교과서 같은 것에서도 이념을 달리하는 여러 계층에서 의견을 개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현장을 지키면서 한평생을 학교마당에서 생활한 교사로서는 정문지도가 군국주의 교육의 흔적은 아닌지 생각해 보기도 한다. 정문을 들어올 때 인사를 해야 하고, 교복을 바르게
나는 스승이라는 말을 버리고 싶지 않다. 우리 사회가 스승이라는 단어를 쓰레기통에 갖다 버려도 나는 그 쓰레기통에서 구겨진 단어를 펼쳐보면서 새롭게 솟아나게 하고 싶다. 주어진 길을 나 스스로 지키지 못해 타인이 쓰레기통에 갖다버리도록 한 자신을 책망하면서 나는 그 쓰레기통에서 끄집어내어 명경지수로 더 깨끗하게 정제해 보련다. 울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더러운 그 눈물이 다 쏟아지도록. 나는 더 크게 울면서. 몸부림쳐 보련다. 한 권의 책을 들고 한 평생을 살아온 사람에게 주어진 높은 단어이자 뭇 사람의 시선이 모아져 우리 사회의 언어 중의 언어인 ‘스승’이란 말을 진정 말하고자 하는 사람의 입에서 소리도 없이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스스로 쏟아내게 하고 싶다. 아침을 식구들과 같이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학교에 출근하고, 주말이면 가족들과 더불어 나들이 제대로 가지 못한 시절이 얼마이던가? 학교에서 학생들과 책과 씨름하면서 보낸 숫한 세월 속에서 얻은 것이 스승이란 단어도 버리고, 이제는 교사라는 단어조차도 내 팽개치는 그런 교실에 서 있는 한 사람으로서의 가르침은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학생은 교실에서 피로해서 잠을 자고, 교사는 잠을 자는 학생 앞에서 목청이
요즘 교육이 참으로 어렵다고들 한다. 교실은 교사와 학생만의 따뜻한 공간이다. 웃음과 행복이 넘쳐나는 곳이요, 주고받는 대화가 스승과 제자 사이의 배움의 길을 열어가는 동맥인 것이다. 학교를 가면 학생은 교실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면서 하루를 보낸다. 그것도 고등학교 인문계 학생의 경우는 아침밥을 먹고 나면 온종일 교실에서 친구들과 선생님과 만나면서 말로써 행동으로써 주고받는 삶의 거실로 만들어 간다. 그러기에 학교는 학생에게 주는 영향은 참으로 다대하다. 학생이 하루종일 생활하는 가운데 부모와 같이 있는 시간은 학교에서 지내는 시간보다 적다. 책을 보면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친구와의 대화를 통해서 말의 정보를 얻어 가는 곳이 학교의 교실이다. 그런 아름다운 교실이 타락과 폭력으로 이어진다면 어느 학부모가 교실로 가는 자녀를 걱정하지 않을 이 누가 있을까? 사람이 모여 지내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이 생기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사소한 것이 발전되어 큰 사건으로 이어지기에 교실은 점점 더 경계의 대상이 되고, 같이 생활하면서도 서로를 의심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진다면 교실을 책임지고 있는 담임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울면서 호소라도 해야 할까? 아니면
한겨레 김00 기자가 인터넷 ‘다음’에 발표한 “난 이렇게 아들의 ‘스펙 조작’에 가담했다”를 읽고 입학사정관에 대한 허와 실에 대한 현실적인 문제를 어떻게 다듬어야 할지 곰곰하게 생각하게 됐다. 초창기라 시시비비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도 자명한 사실이다. 입학사정관제의 자기소개서 쓰는 자격이 정해져 있지 않다. 그렇다고 검증을 거쳐서 제출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엄연히 학생생활기록부가 학교에 있지만 학교에서 검증을 거쳐야만 제출할 수 있다는 조건은 없다. 학생이 쓴 자기소개서를 본인 외는 어느 누구도 검증을 할 수 없을뿐더러 증빙서를 제출해야 할 의무도 없다. 입학사정관 전형에 기록되어야 할 사항이 검증없이 제출되고, 근거도 없이 평가를 받게 됨으로써 제출자의 신뢰성에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이고 대학에서도 기록된 내용만으로 학생을 평가하는 시스템 자체에 한계를 지니고 있기에 스펙 조작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허무맹랑한 소리로 조작을 하는 것이 아니기에 문제는 더욱 오묘하게 발생하는 것이다. 성적이냐? 스펙이냐? 어느 것에 비중을 두고 학생을 선발할 것이냐도 문제인 것이다. 마땅히 대학에서는 스펙도 성적도 대학에 다 적절해야 한다고 할
공립학교 교사로 이 학교, 저 학교를 돌다 보면 어느 사이엔가 자신도 모르게 거쳐간 학교에 대한 야릇한 특성이 행동으로 말로 무심코 보여진다. 그래서 마음에 인상적으로 남는 학교는 그 나름대로의 독특한 향기가 있기 마련이다. 학생들의 인사성이 너무 밝아서 그 학교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경우도 있고, 교장 선생님의 독특한 학교 경영 때문에 인상에 남을 때도 있다. 지금까지 뒤돌아 보아도 학교가 독특하게 나에게 이미지를 형성하였다고 할 만한 그런 학교는 많았지만, 나에게 이모티콘을 만들 기억으로는 떠오르지는 않았다. 그런데 유독 인천초은고에서는 전입해 온 교사에게 작은 장미꽃 화분을 주었다. 나는 이 꽃을 받는 순간 놀랐다. 이런 학교도 있는가? 소중하게 받아서 교무실 나의 책상 위에 놓고서 자주 물을 주면서 길렀다. 잘 자라 줄기가 뻗어서 책상 위로 덩굴을 만들기에 종이 막대를 만들어 펜스를 쳐 주었다. 그랬더니 또 꽃봉우리를 맺어 두 번째 꽃을 피웠다. 첫 번째 꽃을 피울 때는 당연히 한 번은 꽃을 피우는 것이겠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잎사귀도 떨어지면서 뻗어 올라가는 가지에 더욱 애정이 갔다. 두 송이 꽃봉우리가 이제는 네 송이 꽃봉우리를
꽃이 말하는 계절은 봄이다. 거리 곳곳에도, 산야의 어느 곳에도, 물가의 여러 곳에서도 봄꽃은 자신의 얼굴을 깨끗하게 단장하여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웃음을 던져주고, 날아오는 벌과 나비에게 꽃가루를 나누어 주고, 벌레의 먹이도 된다. 그럴수록 베푸는 사랑은 꽃의 아름다움을 더욱 하나의 봉우리로 만들어 씨를 뿌려 다음 해를 이어 나눔을 실천하는 천사로 태어난다. 이처럼 보훈도 꽃과 같은 것이다. 나라를 위해 몸바쳐 일을 한 본인에게나 그 후손에게 노력의 빛을 더 널리 뭇 사람들에게 알려 나라에 대한 소중함과 더불어 사는 공동체에 대한 중요성을 나누어 보자는 의지의 실천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우리는 태어남에 대한 소중함을 부모님께 늘 감사하면서 지낸다. 이런 소중함이 인간의 삶에서 부모의 보살핌을 생각하게 하는 효의 근본이 된다. 그러기에 어버이날에는 부모에 대한 애틋한 정을 기리기 위해 부모님께 꽃을 드리고, 편지를 보내고, 사랑을 드리는 것이다. 이런 연례 행사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부모에 대한 공경심을 이어오게 한 원동력이다. 크게는 부모님이 계시는 나라에 대한 경애심을 생각하게 했다. 이것이 바로 호국보훈으로 이어지게 되는 생각의 밑거름을 만든
KBS1 저녁 8시 임성훈 사회자로 진행되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는 뭇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 길거리에서 포장마차를 운영하는 사람들에서부터 우수한 기업가, 변호사로 성공한 사람들의 성공 시나리오를 5분을 통해 전해주는 강연의 짜릿한 맛은 명강사가 출현하여 1시간 이상을 강연한 그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내면을 뭉클하게 만든다. 살아가면서 겪은 진실이 그대로 표출되기에, 생생한 현장감을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달하기에, 청자들은 마치 자신이 걸어온 길인 양 눈시울을 붉히는 것이다. 살아있는 강연은 바로 이런 것이라고. 수많은 사람들이 “강연 100도”를 거쳐 갔지만 그들의 인생 삶의 과정이 행복으로만 점철된 것은 아니었고, 그렇다고 불행만으로 점철된 것도 아니었다. 행복과 불행의 교차가 꽈배기처럼 꼬여 있어도 그들은 그것을 인간이 가진 용기와 슬기와 인내로 그리고 덕으로 베품으로 이겨냈다. 지금까지 매스컴에서 보여주는 인물상은 영웅지상주의였다. 위대한 인물은 이렇게 해서 성공했다. 위대한 사업가는 이렇게 해서 지금 수억을 소유하게 되었다. 등등 보통 사람들의 생활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장면만을 보여주어 보통 사람들로는 마치 상상속의 꿈의 세상을 그려보는 것 같
2월이 되면 무엇이 생각날까? 일선 교사들에게는 교육과정의 마무리라는 생각보다는 어디를 가게 될까? 아니면 어떤 학교로 가게 될까 등 인사가 핫이슈다. 이처럼 2월의 인사는 겨울철의 냉풍을 열풍으로 바꾸어 놓는다. 인사철이라 유난히 꽃바구니며 화분이며 떡이며 참으로 푸짐한 달이다. 승진을 위해 보내는 축하 화분과 꽃바구니, 다른 곳으로 임용되었다고 상조회에서 마련한 떡. 참으로 인정 넘치는 한국인의 푸짐한 진면목을 보는 것 같다. 건너편 야산에는 하얀 눈이 온 산을 수놓아 2월을 마치 축복의 설국달로 만들어 내고 있는 듯하다. 차거움과 따뜻함의 조화, 검은 것과 흰 것의 대조가 주는 갈등의 진풍경은 한편의 소설 드라마와 같다고 할까? 2월에 겨울이 주는 오묘한 원리와 개념을 무엇이라고 한마다로 표현해야 할까? 마치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를 풀다가 이렇게 고치고 저렇게 바꾼 과정을 연습장에 펼쳐내 놓은 장면은 아닌지. 한낮에 창밖을 내다보는 겨울 모습만 보아도 그렇다. 거리의 아름다운 장식품도 빛을 잃어버렸는지 누추한 조형물같이 서 있고,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 어디를 달렸는지 시커먼 물결자국으로 도배를 한 얼룩들, 인도를 걸어가는 사람들의 두툼한 목도리 세찬
2009 미래형 교육과정에서는 예체능 과목 평가 방법을 바꾸었다. 석차와 평균을 표시하지 않고 ‘우수, 보통, 미흡’으로 평가 기준을 나이스에 기록하도록 하였다. 학부모, 교사, 교육관련 단체 등의 의견을 수렴하여 새 교육과정을 만든 것은 학교 현장에서 지나친 입시 교육으로 인해 규격화돼가는 교수-학습 과정을 다변화하여 보다 넒은 세계를 학생들에게 펼쳐 보이자는 창의적인 의도로 제시한 것이었다. 현 정부가 지향하는 창조교육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소수의 학교에서부터 시작된 예체능 과목 등급 매기기를 이제는 대부분의 학교가 보편화된 것처럼 나이스에조차 기록하여 오히려 입시 과열을 부추겨 2009 미래형 교육과정을 퇴색시키고 있다. 이를 방관만 하고 있을 경우 새 교육과정은 오히려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실패를 거듭할 것이 뻔 한 이치다. 교육과정을 상부에서 백번 만들어 놓았다고 하여도 그것을 실천할 현장에서 지키지 않는다면 백해무익이 되는 것이다. 예체능 과목을 우수, 보통, 미흡으로 평가 기준을 내 놓은 것은 이들 과목 교사의 성적 부정 때문도 아니다. 그렇다고 과목을 점수화해서 평가하면 나쁘기 때문만도 아니다. 예체능 과목을
현대인의 멍에는 일과 시간이다. 그 중 교사의 굴레는 교실이다. 아침 출근에서부터 저녁에 귀가하기까지 교실을 벗어난 교사는 존재할 수 없다. 더구나 담임이 되면 교실과 학생과의 관계는 더욱 밀착된다. 그런데 블록타임제 하의 연속 두 시간 수업은 교실에서 교사의 활동을 강화시키고 있다. 쉬는 시간에 교실에 앉아서 학생들과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하다 보면 학생의 고민과 교사의 고민이 아름답게 봉우리를 맺게 되는 경우도 나타난다. 쉬는 시간은 짧지만 학생들이 사용하고 있는 학용품을, 복장을, 눈으로 다리미질 해 보면 변화의 새로움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우선 교사가 교실에 앉아서 학생과 친구처럼 대화를 나누는 그런 시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또 선생님의 의복도 양복에서 평상복으로, 칠판의 백묵도 다양한 형태의 색상으로 변화를 모색하게 되었다. 교복 주름의 각이 변하여 곡선화되고 고급화된 모습이다. 연필도 칼로 깎아서 쓰던 것이 심만 교체하면 영구적으로 쓸 수 있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책걸상도 높낮이 형식으로 자유롭게 변화를 보인다. 이처럼 교실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모습들이 교사에게는 새로운 고뇌를 만들게 한다. 학생들을 쳐다보고 학생들의 내면을 꿰뚫어 내
10월.숫자를 자세히 쳐다보고 있으면 사람이 거울 앞에 서서 자기를 응찰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처럼 시월은 계절의 중반을 넘어 겨울로 가는 길목에서 한 번쯤은 자신을 뒤돌아 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듯하다. 무서운 태풍의 위력과 폭탄처럼 쏟아붓는 폭우의 거센 힘에도 떳떳하게 이겨내고 풍성의 계절 가을에 접어들어 맞는 10월은 더욱 감미로움을 더해 준다. 들녘을 자동차로 달려갈 때면 누렇게 익어가는 벼들의 황금물결도, 맑은 가을 하늘을 가로지르며 날아가는 산새들의 정겨움도 10월이라는 가을이 주는 짜릿한 맛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동녘의 해 맑게 빛나고 함초롬이 이슬맞은 풀잎들, 태양의 눈부심에 살포시 얼굴을 들 때, 아침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일으키고 지나가는 실바람 촉감이주변 사람들에게여름철 햇살의 향수를 생각케 한다. 청초한 풀잎 사이에서 느끼던 향긋한 내음도 어느 새 자취를 감추고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는 한 잎 한 잎의 낙엽이 대지를 덮어갈 때, 건너편 산야에서 밤나무 가지를 흔들며 밤송이 떨어지기를 바라는 꼬마 개구쟁이 시절이 되살아 날 때면, 산야의 깊은 시름은 어느 새 나의 곁에 와 속삭이고 있다. 산촌의 초가집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던 낙엽 태우던
이번 여름방학 중 “지속가능발전교육”이라는 제목으로 연수를 받았다. 이 연수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제목이 무언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맛이 있었다. 꼭 들어보아도 괜찮을 것이라는 보편적인 인식이 나를 사로잡았다. 인천대학교 연수장에 들어서자, 우뚝 우뚝 선 건물들이 연수장의 고고한 분위기를 연상시켜 주었고, 새롭게 이전한 학교답게 맑고 좋은 대학로는 바다 바람이 우선 나를 시원하게 맞이해 주었다. 교실에 들어서자 안내자는 두꺼운 책을 나누어 주었다. 과자도 잔뜩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쉬는 시간마다 지속적으로 과자며, 빵이며, 연수자들이 지루하지 않도록 온갖 배려를 다하는 면이 참으로 다른 연수에서 볼 수 없는 진풍경이었다. 연수 처음부터 끝까지 강의 내용이 인류의 미래에 기후변화에 대처하는 위기관리 능력을 알리는 계몽교육연수였다. 그렇다면 창조교육은, 지속가능발전교육은, 서로 다른 용어의 의미일까? 강의하는 모 교수는 요즘 유행처럼 사용하고 있는 같은 의미의 용어라고 하셨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인류의 지혜를 총동원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우리의 손에 의해서 멸망의 길로 접어들 것이라는 것이 통상적인 강의 요지다. 우리의 노력은 지속가능발전교육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