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삼스럽게 이런 화두를 던지고 싶은 충동이 문뜩문뜩 든다. 칠판 시각 교육이 화상 시청각 교육으로 바뀌더니 어느 듯, 화상에 나타난 지인 아닌 지인들이 자신들의 식견을 뽐내는 댓글이 봇물처럼 인터넷 교장의 주변을 감싸고 돈다. 순간순간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댓글을 놓칠세라 사건이 일어나기가 무섭게 파고드는 네티즌들의 여론은 벌떼가 마치 달아나는 물체를 쫓는 듯하다.
교육이 언제부터 이렇게 변화를 모르고 변화를 겪고 있는 지 교단에 서 있노라면 교사의 위상이 언제쯤 추락하는 날개를 달게 될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가슴 조이게 다가오는 것 같다. 평생교육기관이 확대되고 있고, 게다가 학교 교육에 대한 회의적인 반응이 더해 감에 따라 대안학교에 대한 목소리가 한층 높아만 가고 있다. 매스컴에 게재되는 식자들의 칼럼도 갑남을녀들의 댓글의 토론장으로 보편화되어 가는 추세. 그 위세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이제는 계층을 가리지 않고 응집되어 가는 것이 마치 성난 노도와 같은 인상을 풍긴다. 인터넷의 댓글은 그 도가 전문가의 손을 빌려 쓴 글이라고 볼 정도로 그 정도가 일정한 선을 넘고 있다. 그에 따라 뚜렷한 절제도 근거도 불확실한 상황에서 감정을 표현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더욱 댓글에 대한 접근을 주저하게 만들곤 한다.
교육 무용론이 고개를 치솟으면서 학교 환경과 교사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해를 거듭할수록 세인들의 귀를 따갑게 메아리치는 것도, 주야를 가리지 않고 전개되는 직업의 무시간 개념, 핵가족으로 인해 가정의 질서가 무너지자 사라지는 겉치레 웃어른 공경풍토, 자식이 부모를 모시지 않음으로써 나타나는 효에 대한 이기주의 등등 계층과 상하를 가리지 않고 나타나는 우리 사회 자화상의 언저리 때문이다. 이런 불합리한 사고와 마음을 고쳐 웃음이 넘치는 소박한 가정으로, 활기가 넘치는 학교 교육으로, 사랑으로 대하는 인간미 넘치는 직업 풍토를 조성해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교육의 현장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다.
다양한 교육학자들이 예언하듯이, 미래의 교육은 로봇과 자기와의 학습으로 전개되고, 인성교육도 지역의 특성이 사라지고 범세계적인 보편성으로 탈바꿈되리라는 조심스러운 견해를 펼쳐내는 이도 많다는 것이 단순히 상상의 세계를 넘어선 비현실적인 발상만은 아닐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인간과 로봇과의 전쟁이 어린 학생들의 만화에 등장해 그들에게 흥미 위주로만 읽혀지고 있지만, 끝임없이 제작되는 성인들의 영화에서도 그 현실이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은 '터미네이트'에서도 볼 수 있다. 상상의 세계가 현실로 점점 그 어둠을 걷어내면서 현실 교육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더욱 가속화시키는 것 중의 하나로 요즘 불거지고 있는 교사들의 다면 평가제다. 다면 평가를 하기 위해서는 교육환경도 거기에 따라 변해야 한다. 아무리 교사를 평가해도 그 교사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단순히 '괘씸죄' 또는 '재수 없어서'라는 표현으로 나타나는 평가라면, 그것도 댓글의 위세를 더해주는 결과만 낳게 된다.
댓글이라는 한 장(場)을 학교의 인터넷에 한정해서 보면, 학생들의 글이 비판의 도를 넘어 단순히 냉소주의 경향으로 치솟는 것은 그들의 현실 교육에 대한 불만이 크기 때문이다. 그들의 학교교육에 대한 불신은 1950년대 우리 사회를 총체적 “불신시대”라고 말한 박경리의 소설을 연상할 정도다. 학생들의 말은 논리가 맞아 들어가지 않는다. 무조건 자기만의 말이 옳고 자기들만의 행동을 최고로 여긴다. 그러기에 베풂이 없고, 친밀감이 부족하고, 서로의 공감대가 부족한 것 같다. 이것은 그들의 마음에 내재된 선생님에 대한 공감대가 우회적으로 비춰져 선생님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면이 많은 결과라 할 수 있다.
청소년들만의 댓글이 무심하게 표현된 글이라고 하겠지만, 교육의 현장으로 옮겨서 그들의 내면을 유심히 통찰하는 자세가 있어야 하는 시기가 도래됨을 느낄 수 있다. 비록 국어의 문법을 파괴시키고, 어휘에 대한 무분별한 사용은 있을지라도 그들의 마음을 동화시키는 것, 즉 제자와 스승의 사이가 하나 되는 길을 찾는 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