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제부터인가 건널목 문화를 연상할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것에 연연하지 않고 빠르게 그리고 줄기차게 달려감을 최고로 여기는 사회를 이상적인 사회로 받아들여 왔다. 그 결과 정치계는 장관 바꾸기를 시간의 흐름으로 따져야 했고, 사회는 초급행 열차를 타고 달려가야 할 성급함도 없는데, 뻗어가는 건물이 30년도 채 되지 않아 온 나라가 아파트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되어 버렸다. 그런 가운데 삼풍 사건은 우리들의 달려감에 대한 건널목 여유를 되새기게 했다.
교육계는 어떻게 흘러왔는가? 이제 대학입시라는 용어는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는 보편화된 상용어가 되어 버렸다. 대학이 한국 사회의 표본이 되어 버린 듯, 대학 입시철만 되면 한 바탕 굿거리장단을 벌이고 지나가야 하는 통과의례가 되었다. 한국 교육의 이런 의식구조를 뒤바꾸고자 초스파르타식 역량을 발휘한 모장관도 있었건만, 여론에 밀리는 마녀재판으로 인해 장관직을 떠나야만 했다. 그렇게 추진력이 일관성이 없다 보니 어느 누가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이 되어도 새로운 안을 내놓지 못하고 장관 명칭만 달고 직을 끝내고 마는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 결과 국민들의 혈세만 축내는 꼴이 되어 가고 있다. 장관은 연금이 없는가? 일하지도 않고 평생 연금을 받는 직위라면 그 보다 좋은 직위도 없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건널목은 과연 어디일까? 다시 한 번 돼 짚어 보고 싶다. 며칠 전에는 인터넷에 학생이 교사에게 매를 맞았다고 하의를 벗은 채로 상처 난 것을 찍어 실어 놓은 것을 보게 되었다. 그것이 비록 한 일례에 지나지 않다 하더라도 매스컴의 지나친 보도는 삼가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비록 교육계의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좋지만 비판과 폭로를 위한 보도는 교육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학생과 학부모, 학생과 교사, 학교와 사회 다같이 건널목에서 한 번쯤은 잠시 숨을 고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진정 우리 교육계를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2005년 5월 29일 모 일간지에 모대학 교수의 강의에는 학생이 꼭꼭 찬다는 기사를 일면에 실어 놓은 것을 보았다. 대학에 학생들이 듣고 싶은 것을 가려서 듣고 재미있는 강좌에 몰려드는 오늘의 수업 방식이 교수들을 웃음과 긴장으로 몰아넣고 있기에 이런 보도는 독자들에게 신선한 이미지로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긍정적인 교수법을 보도함으로써 대학에 대한 이미지, 일선 교수들에 대한 보이지 않는 자극 등은 가르침을 주로 하는 선생님들은 주의 깊게 읽어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교수신문이 이런 기사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야 하지만 일간신문조차도 이제 교육의 개혁과 교육의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직 사회가 교사 다면평가제로 교육인적자원부와 교총의 대립이 첨예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일간지의 이런 보도는 교육신문들이 앞장서야 함을 반어적으로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교육인적자원부는 일을 추진하는데 있어 왜 그토록 쌩이질만 일으키는 지. 현장의 교사들은 답답하기만 하다. 왜 여울목은 없는가? 왜 워밍업은 없는가? 모든 일이란 완벽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 교육에 대한 불신이 하루 이틀에 걸쳐 현직 교사나 학부모에게 인식되어진 것이 아니기에 하는 말이다. 누적되어온 불신이 오늘에 이르러서 만성피로로 여겨져 그것에 대한 싫증만 남는 꼴이 되어 버렸다. 들어도 싫고 아예 말조차 내기를 거부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는 것은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깊은 반성이 필요한 것이다. 교육 행정가만이 모든 잘못을 지는 것이 아니다. 현장 교육을 잘했더라면 오늘과 같은 다면평가제는 과연 있었을까? 다면평가제를 거부하는 이유에 서 있기는 하지만 현장 교사로서도 반성할 것은 반성해야 한다고 본다.
교육 행정가들이 발 빠르게 시대변화에 대한 직무 연수를 추진했는가? 그것에 대한 대비로 학교 현장에서 연수를 하게 했는가? 지금에 와서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건널목에 서서 잠시 파란불이 켜질 때까지 기다려주지 못하고 조급성으로 신호등이 고장 나서 파란불이 켜져지지 않는 듯,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보고 투덜거리는 우리들의 자화상은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