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1․2학년은 하계방학 중 주당 60시간, 3학년은 주당 100시간을 최대점으로 설정해 놓고 교사간에 설전의 실마리를 인천시 교육당국은 남겨두고 있다. 하지만 60시간이든 70시간이든 학교운영위원회에서 안건이 통과되면 그 시행은 교사들이 담당하게 된다. 교총과 전교조 그리고 교육인적자원부 간의 조정안이라고 하지만, 고등학교 보충수업은 시․도마다 각각 다른 것 같다. 일정한 기준이 없는 상태에서 각 시․도교육청은 교육관련 단체들과 협의를 통해 훈령 아닌 훈령 형식을 취해 일선학교에 공문을 보내고 있다.
학교수업은 사회교육의 거울 돼야
중앙통제 형식을 띤 시 교육청의 보충수업 시안이 시․도교육청마다 각각 다르게 나타나게 됨에 따라 사교육비 절감이라는 교육인적자원부의 지시에 정반대의 수업을 하고 있다. 전교조에서는 보충수업 시간을 제한하자는 의견을 내세운다. 그것은 학생들에게는 건강에 무리함을 초래한다는 것이고, 교사들에게는 건강에 무리를 자아낸다고 한다는 데 근거를 둔다. 사실 전교조의 주장도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학생들이 보충수업을 많이 한다고 학생들의 건강권에 문제가 있고, 하지 않는다고 건강권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학생들이 서울에 소재한 소위 명문대에만 가야 한다고 야단법석을 떠는 데 있다. 대학이 남아돌아 학생이 대학을 선택해서 가야 할 판에 보충수업 때문에 학생들의 건강권과 교사의 건강권이 문제화된다고 하는 문제제기는 이데올로기 시비에 지나지 않는다. 학교에서 보충수업을 중단했을 경우 학생들이 집에 돌아가서 편히 쉬고 학교 수업 시간에 주어진 과제만 수행한다고 생각하는 교사나 학부모는 과연 얼마나 될까?
남아도는 대학을 두고서도 소위 명문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아우성치는 전국의 인문계, 실업계 고등학교는 과연 무엇을 위해 이 여름에 몸부림치며 교사의 사명감을 외치고 있는가? 우리 교육의 가치관 실종에 울분을 토하고 있는가? 아니면 옥석을 가리기 위한 교육에 괴로워하고 있는가? 교사들의 마음속 잣대는 어느 쪽에 있는가? 정말로 우문 아닌 우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거리를 지나가는 행인이 택시 운전사가 담배를 빌려 주지 않는다고 운전사를 때려 사망하게 하고, 한강변에서 여인이 성폭행을 당해 구원을 요청해도 지나가는 사람도, 조깅하는 사람도 내 일이 아니라는 둥 무관심해 하고 신고조차 외면하는 도시의 익명성이 나타나는 세태, 게다가 조국을 지키는 군인에게 접근하여 그들이 가진 총을 빼앗고, 칼로 그들을 찌르고 도주하는 우리 사회의 가치관의 실종은 어디서 복원할 것인가? 이성에 호소할 것인가? 감성에 호소할 것인가? 그 어디에도 답은 없다.
오직 답다운 답을 찾아낼 곳이라고는 교육의 현장을 바로 지켜가는 것 외에 다른 방안이 없지 않는가? 이런 사례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기에 마치 달구어진 냄비가 금방 식어버리듯,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하는 망각증상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모습은 아닌지.
7월 25일 아침. 모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출근하는 길에 서울 모 대학에서 리포트를 너무 많은 학생들이 복사해서 제출해 그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고 하는 어처구니없는 보도가 있었다. 그것도 소위 한국의 명문대학이라고 일컬어지는 곳에서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었다고 하니 과연 대학생으로서의 인격이 바르게 형성되어 가는지 의문이다. 이들이 졸업을 하여 이 사회의 참된 일꾼이 될 수 있을까?
이처럼 비뚤어진 사회의 자막들이 시야를 스쳐갈 때마다 느껴지는 인성교육.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 같다. 학교교육의 맑고 깨끗한 배움이 사회에서 실천되어 꽃피워질 때 교육은 그 성과를 향기처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처한 지금의 상황은 개혁을 지향하고 있는 상태다.
이 시점에 보충이네 자율학습이네 등 이를 두고 왈가왈부 할 것이 아니라 교육의 창의성을 길러내는 쪽으로 의견을 모아 교재를 개편하고 학습의 각도를 대학진학 쪽으로보다는 사회발전에 필요한 인간을 육성하는 데 온갖 심혈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과거의 병리현상들은 학교교육에 대한 참된 의미를 퇴색시키는 근거가 되기에 교단에서 외치는 소리는 도루묵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바른 교육은 밝은 사회의 초석
보충수업이다. 자율학습이다. 모두가 배우는 학생들에게는 배움의 기쁨일 것이다. 그런데 왜 그것이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 방학이라고 하여 집에서 쉬어야 하고, 방학이 아니라고 해서 학교에서 보충수업은 해도 된다는 취지가 잘못된 것이다. 방학에는 학생들이 진정 쉬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방학을 통해 그 동안 배웠던 것을 직접체험하는 체험학습장을 찾아 나서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시설이 부족한 우리나라 현실에서는 학생들에게 이론적 간접체험을 더 강화시킬 뿐이다. 한국 교육은 교육에 투자되는 교육비가 미미하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다양한 직접체험의 장을 만들어 주지 못하는 것이 맹점으로 작용하여 학생들에게 불만거리로 다가서고 있다. 빈부간의 격차가 심화되어 가는 한국 사회에서 교육의 우수한 질적 체험을 위해 방학 동안에 다양한 곳을 가야 하는 학생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학생이 많기에 학교에서 그들에게 주입시키는 이론 강의가 아직도 유효할 뿐이다.
학교의 보충수업, 자율학습은 과연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될까? 앞으로 학교에서 자율학습과 보충학습을 얼마간 할 수 있는 지 그것이 의구심으로 다가올 뿐이다. 서구화되고 세계화되어 가는 교육의 추세로 볼 때, 학교교육이 사회의 변화에 따라가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다. 학교 보충수업 자율학습이 중단되는 그 날 학교 교육은 진정한 교육의 장으로 돌아간다고 보장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