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저의 마음에 사랑과 즐거움을 안겨 주신 은사님께 감사드리며, 연락 자주 드리지 못한 것이 죄송합니다. 항상 초등학교 시절을 생각하며 따뜻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렵니다. -제자 영철 올림-’
1983년에 남도의 끝자락 고흥에서 6학년을 가르치던 때 만난 제자가 보낸 카드이다. 이젠 병역의무를 다 하고 대학까지 마친 후 한국통신에 취직해서 서울 생활을 하는 건실한 청년이 된 제자. 결혼식 주례까지 부탁받고 고흥까지 내려가서 주례를 서 준 후, 아이까지 보았으니 이젠 내가 제자의 아이에겐 할머니뻘이다.
그 아이와의 첫 만남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된다. 아이들과 처음 만나는 날, 서로를 소개하고 1년을 시작하는 소망을 이야기 한 후, 교실을 정리해야겠기에, “오늘, 선생님이랑 같이 교실 정리할 사람?” 이런 경우 선뜻 손을 들어 자원하지 못하는 게 시골 아이들이다. 마음이 있어도 수줍어서 망설일 뿐이다.
“선생님, 제가 도와 드릴 게요.” “참 고맙구나. 이름이 뭐지?” “예, 김영철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말하던 어린 영철이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1983년 그 해에 내가 가장 먼저 이름을 외운 아이. 영철이는 첫날의 기대처럼 매사에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15년이 지난 지금도 영철이의 전화를 받거나 방문을 받으면 그 때의 추억을 떠올리며 즐거워 한다.
영철이가 주번장이 되면 창문의 고리를 빠짐없이 채워서 학교의 문단속이 가장 잘 되었다. 늘 성실하고 열심히 공부하던 영철이는 전교어린이회장으로서도 신망을 받을 만큼 모범생이었다. 나는 그때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남편의 근무지가 멀어서 고흥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동네에 방을 얻어 시작한 작은 살림살이. 당연히 내 방은 아이들의 아지트가 되었고 멀리 사는 영철이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린 학급 이야기, 독서하기, 밤늦게 라면 끓여 먹기 등으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나의 좁은 방에서는 밤늦도록 이야기가 새어 나왔다.
가을이면 홍시를 가져오고 밤을 주워오던 ‘이삐’ 라는 애칭의 창근이, 항상 언니, 누나처럼 공부 잘하고 의젓한 경숙이, 키 크고 미남인 병대, 다부지게 일 잘하고 항상 웃던 병우는 단골손님이었다. 우리 방에 오는 날이 많다고 영철이 엄마가 쌀과 김치를 담가 오셨던 일까지 생겼으니 아이들과 나는 똑같이 어렸던 것일까?
이들에게 팔베개를 해주고 한 이불 속에 발을 넣고 장난치던 그 때가 아련한 추억이 되었다. 아이들과 함께 사는 날이 많아서였는지 우리 반은 말썽을 피우는 아이들이 없었다. 같이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책을 읽다 보면 아이들의 고민은 눈 녹듯이 사라졌고 고민이 있다 하더라도 슬기롭게 이겨내곤 했던 아이들.
나는 지금도 아이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길은 같이 사는 거라고 믿고 있다. 열린 가슴으로 대화하는 것이 최상이다. 그때, 나는 참으로 행복한 교사였다. 겨울방학이라 멀리 떨어져 집에 돌아와 있으면 아이들은 몇 통씩의 편지를 보내왔다. 이젠 그들 모두다 청년이 되었고 아이를 가진 가장도 생겼다.
지금도 그때를 소녀처럼 그리워 한다. 가끔은 나의 사랑이 줄어들어 아이들과 피상적으로 만나는 건 아닌지 자책한다. 살림하는 아내와 어머니로서 제자들과 한솥밥을 먹는 일이 거의 없어진 지금. 아이들은 선생님의 눈길만큼, 손길만큼 자란다는 신념에는 변함이 없다.
요즈음은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켜기가 두렵다. 변해 가는 세상 인심 속에 교직 생활이 결코 보람만으로 살 수 없어진 현실이 마음 아프지만, 해맑은 아이들의 눈빛을 보면 온갖 시름이 사라지기에 용기를 내어 아이들을 사랑하는 일을 멈추지 않으려 한다.
내 팔베개를 베고 한 방에서 잠을 자곤 했던 오래 전의 옛 제자들이 그리운 걸 보니 나도 이제 나이가 들었나보다. 직접 찾아뵙지 못해 죄송하다는 전화를 받아도 기쁜 이 자리에 감사한다. 어디에 살든 건강한 모습으로 가정을 꾸리고 잘 살아가길 바랄 뿐, 결코 무소식이 서운하지 않으니 이렇게 많은 가지와 열매를 거드린 나무가 세상에 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