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은신처, 피난처인 그대,
책을 만나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내 눈물 받아준 너는 바로 책이었구나. 1998년 12월 24일 제주 공항 서점에서...'
가을이면 어김없이 한 번쯤 찾게 되는 시집,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을 열면 만나게 되는 연필로 적은 나의 낙서가 나를 반긴다. 2박3일 동안 제주여행을 하다 남편과 말싸움으로 토라진 내가 마음을 달래려고 샀던 책이었다. 말장난을 좋아하는 나에 비해서 늘 선비처럼 반듯하게 원칙적인 말밖에 하지 않는 남편에게 장난말을 걸었다가 무안을 당하고 토라졌던 7년 전 겨울밤의 영상이 그대로 전해오는 책이다.
아마 그때 나는 이 시집을 읽고 토라진 걸 후회하고 금방 화해를 했으니 책값을 충분히 치른 셈이다. 잠언 시집답게 연필로 군데군데 줄이 그어진 걸 보면 마음이 가라앉거나 왜 사는 지 심드렁해질 때마다 즐겨 찾은 흔적들이 즐비하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재미있는 일이 뭐그리 많을까마는 가끔은 잊고 살다가도 뒤를 돌아보며 '사는 게 이게 아닌데'하며 한숨을 내쉬게 되는 때가 바로 지금같은 가을이었나보다.
벼논의 나락들이 고개를 숙인 채 겸손하게 서 있는 풍경이 그렇고 토실토실하게 살이 오른 알밤들이 무거워진 몸을 어쩌지 못하고 세상 속으로 나뒹글 때 나는 언제 저렇게 철들어서 스스로 떨어지나 깊은 한숨을 내쉴 때...꽃이란 꽃은 다 나와서 찬바람이 오기 전에 부지런히 열매를 익히는 모습을 볼 때면 다시 떠오르는 책이 바로 이 시집이다.
한꺼번에 많이 읽으면 배탈이 날 것같은 이 잠언 시집은 베스트셀러 시인 류시화가 엮은 것으로, 20여년 간 명상과 인간 의식 진화에 대한 번역서를 소개하면서 저자가 읽고 사랑했던 글들을 모은 잠언 시집이다. 인디언에서부터 수녀, 유대의 랍비, 회교의 신비주의 시인, 걸인, 에이즈 환자, 가수, 시대를 뛰어넘은 무명씨 등 평생 외길을 걸어갔던 사람들의 시를 묶은 이 책은, 그들만의 삶의 방식에 대한 냉정한 관찰법과 웃음, 감동과 슬픔, 풍자와 반어 등을 통해 금강석 같은 삶의 지혜와 통찰을 전한다.
하루에 한 번씩 읽을 수만 있다면 동서양을 넘나들며 만날 수 있는 삶의 진국들이 군더더기 하나없이 잘 걸러져서 먹기 좋게 차려져 있다. 인생의 시작에서 죽음 앞에 이르는 유언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살고 결혼을 하며 자식을 기르고 행복을 추구해야 하는지, 정말 무엇이 가장 소중한 일인지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짚어가며 친절하게 길을 안내해 주는 지침서 구실을 하는 시집이다.
낭만을 노래하거나 몽상적이지 않으면서도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영혼의 목소리로 나직이, 그러면서도 강렬한 주제의식으로 한 편 한 편마다 가르침이 넘친다. 한 편의 시를 접할 때마다 나는 거울을 들고 내 영혼을 비춰보는 것같은 부끄러움을 안고 고백성사를 하는 신자가 된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다. 시 한 편으로 이야기 한 편이 나올 수 있을 것같은 무게와 삶의 체험들이 행간마다 빼곡히 숨어 있어서 결코 빨리 읽어낼 수 없게 만드는 시집이다.
이 시집의 대표적인 작품인,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를 기울였으리라.
더 즐겁게 살고, 덜 고민했으리라.~~~ 킴벌리 커버거 지음'을 비롯하여 때로는 철학적이고 은유적이며, 종교적이고 체험적이면서도 높은 산에 서 있는 듯한 시원함과 넓은 바다를 보는 듯한 탁트임으로 가슴 속에 선명한 시어들을 파닥이게 하는 묘한 선율을 숨기고 다가서게 하는 책이다.
개인적으로 책을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면 주저하지 않고 이 시집을 사곤 했었다. 어른이라면 당연히 봐야 할 책이고 청소년이라면 어른이 되기 전에 친구를 삼아도 좋으며 결혼할 사람이라면 혼수품 속에 꼭 권하고 싶은 그런 책이다. 개인적으로 류시화님의 책들을 즐겨 사는 편이라서 중독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이 가을에도 어김없이 이 시집을 잠들기 전에, 아침 잠에서 깨어나 머리맡에서 만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이 시들을 한 편도 제대로 외우지 못하는 나의 한계에 서글퍼하며 망각 곡선을 최대한 느리게 작동시키는 길은 자주 읽는 수밖에 없음을!
아끼는 제자들이 하나씩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멀리서라도 그들의 행복을 빌어주며 이 가을에 보내주고 싶은 시집으로 이 책을 전하고 싶다. 한 살이라도 더 나이들기 전에 읽어보기를 권하며, 다시 읽을 때마다 나를 비우게 하는 시집 속에 들어가 나도 가을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