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에서 11월의 문화인물로 지정한 매천 '황현' 선생님. 황현 선생님은 1855년 전남 광양 출신으로 1905년 을사조약 체결로 국권이 강탈되자 을사 5적의 매국행위를 규탄했으며 1910년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자 절명시 4수와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신 분입니다. 특히 황현 선생님은 흥선대원군의 집정부터 국권 피탈까지 역사를 다룬 '매천야록'의 저자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10월 31일)은 16회 째를 맞이한 매천백일장이 열리는 날입니다. 이 고장 구례가 낳은 애국지사를 마음 속에 새기고 그 분의 시 정신을 문학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마련된 자리라는 사실을 아직은 어린 학생들이 제대로 알 리 없지만, 그래도 1년에 한 번쯤이라도 매천 선생님의 고귀한 뜻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이 날의 의미는 무척 크다고 생각합니다.
마침 행사를 끝낸 '피아골단풍제'와 매천 선생님의 사상을 연결시켜보며, 내 마음은 단풍처럼 붉어지고 있었습니다. 피아골의 단풍이 저렇듯 핏빛인 까닭을 오늘에야 알았으니 그것은 곧 매천 황현 선생님의 피보다 더 붉은 우국충정이 서린 탓이 아닐까 하는...
그 분이 나라가 없어지는 울분을 담아 토해낸 절명시를 읽노라면 열정적인 삶의 순간을 한 잎 붉은 단풍으로 생을 마감하는 모습을, 노년이 아름다운 한 사람의 역사 학자와 시인으로 나라 없는 책임을 통감하는 피눈물을 봅니다.
경술국치(1910년 8월29일), 나라가 망한 지 1주일이 지난 9월7일 새벽, 그분은 아들과 동생에게 남긴 한 장 글(<遺子弟書>)에서, ‘나에게 죽을 만한 의리는 없다. 다만 나라가 선비를 기른 지 오백 년인데, 나라가 망하는 날에 그 어려움을 위해 죽는 자가 하나도 없다면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내 위로는 하늘이 내린 도리를 저버리지 않았고, 아래로는 평소 읽었던 책을 저버리지 않는다면, 어둠 속에 길이 잠들어서도 참으로 통쾌함을 느끼리라. 너희들은 너무 슬퍼하지 말아라’고 했습니다.
<목숨을 끊으며(絶命詩)>
-매천 황현의 유시-
어지러운 세상을 겪으며 흰 머리 노년에 이르도록
몇 번이나 목숨을 버리려 했으나, 못하였네
오늘은 참으로 어쩔 수 없게 되어
가물거리는 촛불만 푸른 하늘을 비추네
요사스러운 기운에 가리어 임금별 자리를 옮기니
구중궁궐은 침침해져 햇살도 더디 드네
조칙(詔勅)일랑 이제 다시는 없으리니
옥 같은 종이에 천 갈래 눈물이 젖네
새 짐승 슬피 울고 산천도 찡그리네
무궁화 이 나라가 이젠 망해 버렸구나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 날 생각해 보니
인간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어렵기만 하구나
내 일찍이 나라 위해 작은 일도 못했으니
다만 인(仁)을 이루고자 할 뿐 충(忠)은 아니라네
겨우 *윤곡의 순사를 따른 데서 그칠 뿐
*진동의 죽음에 미치지 못함이 부끄럽구나
* 윤곡 : 송나라 사람으로 몽고병이 쳐들어오자 온 가족이 절개를 지켜 죽었다.
* 진동 : 송나라 사람으로 간신들을 물리치라고 몇 차례 상소하다가 저자거리에서 목베임을 당했다.
<을사보호조약 소식을 듣고서>에서 매천은 <한강물이 울먹이고 / 북악산도 찡그리는데 / 세갓집 벼슬아치들은 / 예 그대로 노니는구나 / 동포들이여 청하노니 / 역대의 간신전을 읽어보오 / 나라 팔아 먹은 놈치고 / 나라 위해 죽은 자는 없었다오>라고 울부짖었다고 합니다.
오늘 글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매천백일장에 나갔지만 몸과 마음이 모두 추웠습니다. '글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책임을 느껴야 함을 알았고 '글을 가르침'의 무거움을 질타하는 그 분의 시어들이 너무 아팠기 때문입니다. 글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선생이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닌 지, 백일장 입상의 꿈을 안고 추운 강당 바닥에서 정성을 들여 글을 쓰는 아이들의 원고를 읽으며 자신에게 묻고 또 물었습니다.
글쓰기 행사를 끝내고 황망히 돌아가는 학생들이 미처 치우지 못한 쓰레기들을 우리 분교 아이들과 같이 정리하면서 11월은 고운 단풍처럼 살다간 매천 선생님을 가슴팍에 새길 것을, 우리 아이들이 우러러 볼 이 고장의 자랑스러운 인물로 새겨주리라는 다짐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