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 교육을 위한 어느 저명한 교수의 지혜가 담긴 이야기를 오래 전에 들었다. 많은 교육자들이 한번쯤은 들은 이야기일 것이다. 꽤 오래된 실화라고 하는데 그 이야기의 줄거리를 대충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어느 저명한 생물학 교수의 아들이 선생님을 테스트해 보려고 했는지 이상하게 생긴 식물을 가지고와서 선생님에게 묻자 담임선생님은 잘 모르겠다며 책에서 찾아보겠다고 하였단다. 너의 아버지가 생물학자 이니까 아버지께 여쭤보라고 하며 아이를 돌려보냈다.
집에 돌아온 이 아이는 그 식물을 들고 아버지에게 여쭤보았다. “글쎄, 이것은 나도 잘 모르는 식물이다” 하며 책에서 찾아보아야겠다고 시치미를 떼고 너희 선생님에게 여쭤 보는 게 좋겠다고 하였다. 그러고 나서 담임선생님에게 전화를 하여 그 식물에 대하여 자세히 알려주었다고 한다.
다음날 담임선생님은 그 아이를 조용히 불러 어제 질문한 식물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 주었다고 한다. 이 학생은 생물학 박사이신 아버지도 잘 모르는 것을 우리 선생님이 잘 알고 설명을 해 주시는 것을 보고 아버지보다 실력이 있는 훌륭한 선생님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존경심을 더 갖게 되었으며 더욱 우러러보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만약 생물학 교수인 학부모가 아들의 질문을 받고 자기 자신의 권위를 생각하고 아들에게 자랑이라도 하듯이 그 식물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선생님의 권위는 떨어졌을 것이고 아이는 선생님을 실력이 없다고 깔보며 가르침에 열중하지 않았을 것이며 수업시간에 딴청이나 피우는 아이가 되었을 것이다. 즉 자식교육에 도움보다는 해(害)가 되었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현명한 교수는 자식교육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지혜로운 학부모였다. 아버지의 권위 보다는 자식을 가르치는 선생님의 권위를 더 가치 있게 생각하고 자신을 낮추며 자식이 선생님을 존경하고 실력 있는 선생님으로 믿을 수 있도록 현명하게 교육적으로 대처한 부분이 더 우러러 보이지 않는가? 즉 선생님의 권위도 세워주었고 자식교육을 올바르게 한 두 마리의 토끼를 다잡은 지혜는 오늘날의 학부모에게 본보기가 되었으면 하는 이야기이다.
학생들 앞에 서는 선생님의 권위는 학생들에게 절대적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선생님 자신이 아이들로부터 존경을 받도록 부단한 노력과 언행의 솔선수범이 있어야 한다. 가르치는 교사의 권위는 학부모가 세워주어야 올바른 자식교육이 되는 것이다. 학부모가 자식 앞에서 교사를 험담하거나 약점을 들추어 권위를 짓밟는 것은 결국 자식교육에 어떤 악영향을 줄까를 생각하지 못하는 근시안적인 우를 범하는 것이다.
교사의 권위는 학교의 관리자인 교장, 교감과 동료 교직원이 세워주어야 한다. 학생들 앞에서 존칭어를 사용해야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선생님들끼리 언쟁을 하거나 친하다고 하여 아무렇게 대해서도 안 될 것이다. 권위주의적인 학교장이 학생 앞에서 교사를 나무라는 일도 선생님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또한 교사의 권위는 장학사를 비롯한 교육청에서도 상급기관이지만 학생들 앞에서는 교사의 권위를 지켜주어야 하는 것이다.
현장교원의 권위는 교육부에 근무하는 장관이하 모든 분들이 세워주어야 한다. 교원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정책을 펴서 현장교원들의 어깨가 축 늘어지게 하면 그 나라의 교육은 암울한 것이다. 그러나 현장교원이 신바람이 나서 학생교육에 전념할 수 있는 좋은 교육정책을 펼치면 그 나라의 교육은 잘 될 것이고 비전이 있는 것이다.
교사의 권위는 언론을 비롯한 사회 각층에서도 지켜주어야 한다. 선생님도 인간인지라 실수나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를 마치 전체 교원이 그런 것처럼 침소봉대하여 신문이나 방송에서 다룬다면 온 국민과 학생들 앞에서 교권은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이다.
교원의 권위를 세워주는 문제는 교원만 보호하자는 뜻이 아니라 이 나라의 희망이요 미래가 달려있는 학생들을 위한 것이고 크게 보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이다. 어느 생물학 교수의 현명한 지혜에서 자신을 낮추면서 자식의 교육을 위해서 선생님의 권위를 지켜준 깊은 뜻을 되새겨 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