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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언·칼럼

교과서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


모르긴 해도 우리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접하는 책이 교과서일 것이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기역, 니은, 디귿부터 시작해서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영수야, 놀자.', '철수야, 놀자.'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교육과정이 모두 교과서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사회 생활에 필수적인 기초 지식과 교양을 자상하게 일러주는 것도 교과서이다. 그러고 보면 교과서는 지혜의 보고이며 친구이며 삶의 애환을 함께 나누는 동반자이다.

시대의 흐름과 함께 교과서에 대한 생각과 내용도 참 많이도 변했다. 필자가 초등학생이던 30년 전만 해도 교과서 하면 천편일률적인 편집과 모양으로 개성이 없었다. 그래도 워낙 책이 귀하던 시절이라 대접만은 융숭했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어쩐 일인지 교과서를 홀대하는 경향이 짙다. 예전에 비하면 크기도 훨씬 커졌고, 내용도 알찰 뿐만 아니라 삽입된 삽화도 대부분 칼라로 인쇄되어 화려하기가 그지없는데도 말이다. 필자의 학창 시절에는 가로 13센티미터 세로 19센티미터의 사륙배판 크기의 흑백 교과서가 전부였었다. 이에 비하면 요즘 교과서는 정말 환골탈태요 괄목상대다. 그런데도 왜 아이들은 교과서를 못살게 구는 것일까?

수업을 하다보면 아이들이 교과서를 학대한 경우를 종종 본다. 교과서의 학대는 주로 교과서의 제목을 가지고 행해지는데 그동안 내가 발견한 것만 여기에 기록하여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

국어 교과서는 주로 '굶어', '북어', '꿇어', '죽어' '문어' 등으로 자음을 약간 변용 하여 개명하며, 사회 교과서를 '생선회'로 개작한 것은 차라리 창의력에다 재치까지 번득인다. 과학을 '괴한'이나 유사성이 있는 '광합성'이나 '보관함'으로 고치기도 한다. 물리는 '물러'로 고친다.

수학 교과서는 모음 하나를 첨가하고 자음 하나를 살짝 지워 '쥐약'으로 고치기도 한다. 수학을 지독히도 싫어하는 아이들의 정서를 대변하는 작명법이다. 수학이 얼마나 싫었으면 '쥐약'으로 고쳤을까. 측은한 생각이 들며 공감이 가기도 한다. 음악을 펄펄 끓는 '용암'이나 '음 ∼ 학교가 싫어'로 패러디 한 것을 보면 저절로 웃음이 난다. 기술·가정은 '박봉곤 가출사건'으로, 도덕은 '도널드덕'과 '똥떡'으로, 한자 교과서는 '야한 자습서'로 둔갑시키기도 한다. 사회과 부도는 듣기에도 섬뜩한 '사회가 부도났다'로 미술책을 '마술'로 바꾸는 것은 오히려 진부하여 애교스럽기까지 하다. 국사책을 '국자' 또는 '굶자'라든지 가정을 '학교가 정말 싫다'로 전자책을 낯뜨거운 '정자(精子)'로 고치는 것은 이제 흔한 일이다. 심지어 초등학생의 책꽂이에 '슬기로운 성생활'이 꽂혀있어 깜짝 놀란 적도 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온통 꽉 막힌 제도 속에서 오직 입시에만 매달리는 아이들의 억눌린 정서가 그대로 교과서 개명이란 반항적인 놀이로 대변된 것으로 짐작된다. 개명한 교과서를 서로 돌려보면서 학생들은 강한 유대감과 동질감을 느끼는 것이다. 개명한 교과서의 이름만 보아도 그 학생의 학습 경향이나 정신 상태를 대략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교과서 개작은 학생 개개인의 개성이 잘 드러난다.

이렇듯 학생들의 온갖 장난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베풀기만 하는 교과서가 어쩌면 이 혼탁한 시대에 진정한 성자의 모습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교과서야말로 진정 아낌없이 주는 나무인 것이다. 그래서 난 오늘도 교과서를 경외하며 사랑하는 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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