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서운 겨울이 다녀간 새봄이 활짝 웃고 있다. 순백으로 넘실대던 벚꽃 잔치와 함께 개나리와 진달래의 환한 미소가 때묻은 세상을 원색으로 물들이고 있다. 가슴 시린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화려한 부활을 알리는 자연은 언제나 그렇듯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위로의 손길을 내민다. 간밤에 내린 꿀맛 같은 봄비 탓인지 움막으로 오르는 길은 이제 막 다져놓은 밀가루 반죽처럼 끈적거렸다. 신발에 척척 달라붙는 진흙과 함께 몇 걸음 더 올라가자 터진 구름 사이로 환한 햇살이 머무르고 있는 움막이 시야에 들어왔다.
유범수씨가 이곳 선산으로 들어온 지도 벌써 5년째로 접어든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고자 시묘살이를 자청한 것이다. 범수씨가 상복을 입고 산중에서 기거하기 시작하자 마을 사람들은 물론 주변 가족들마저 설마 삼년을 채우겠느냐며 반신반의하는 기색이 역력했다고 한다. 그런 범수씨가 지난해 어머니 탈상을 마치고 이번에는 아버지를 위한 시묘살이에 나선 것이다.
상주를 찾는 소리를 듣고 범수씨가 얇은 비닐로 만든 움막문을 밀치고 나왔다. 지천명을 넘긴 나이에도 소년처럼 맑은 눈을 지닌 범수씨가 반갑게 방문객을 맞았다. 그 어느 때보다 혹독한 추위가 기승을 부렸던 지난겨울을 무사히 이겨낸 범수씨의 얼굴에는 화사한 연둣빛 봄이 곱게 내려앉아 있었다.
세상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돌아가신 부모님 묘소 곁에서 범수씨는 꼬박 5년을 보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말 못할 어려움이 왜 없었겠는가. 하루 세끼 따뜻한 밥을 지어 상식을 올리고 문안 인사를 드리는 것도 빠뜨리지 않았다. 허술한 움막에 의지하여 뼈를 깎는 추위와 모기떼가 극성을 부리는 무더운 여름밤도 범수씨의 효심을 꺾지는 못했다.
부친 탈상(5월21일)을 마치면 범수씨는 잠시 가족과 함께 지내다가 다시 충남 서산시 운산면 개심사 골짜기에서 홀로 기거하는 노인(96살)을 돌봐드릴 예정이라고 한다. 생전에 어머니와 교류를 나누던 할머니라고 한다. 할머니와 함께 지내며 그간 시묘살이를 하며 써 두었던 일기를 바탕으로 전통적인 효문화를 조명하는 책을 집필할 계획도 갖고 있었다.
잠시 대화를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긴 잠에서 깨어난 나무들이 기지개를 켜는 사이로 냉이꽃, 자운영, 꽃다지, 제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순간 잘 정돈된 범수씨 부모님 묘소 뒤편으로 호위병처럼 서 있는 할미꽃 군락이 눈에 들어왔다. 예로부터 자녀의 효성이 지극한 묘소 주변에만 핀다는 꽃이다.
갈수록 느슨해지는 가족관계를 반영이라도 하듯, 부모보다 먼저 목숨을 끊거나 생활고 때문에 패륜을 저지르는 못된 자식들 소식이 종종 들려온다. 각박한 세상사를 모르는 것은 아니나 인륜마저 저버리는 세태 앞에는 그저 마음이 무겁고 안타까울 따름이다. ‘조문효도(蚤蚊孝道)’라는 말이 있다. 부모님의 방에 누워 빈대, 벼룩, 모기를 유인함으로써 부모님을 보호해 드린다는 뜻이다. 이런 방식의 효도도 있는데 부모님 가슴에 못을 박는대서야 어디 자식이라 할 수 있겠는가.
오늘은 ‘어버이날’이다. 부모님을 섬기는 효심이란 결코 물질이 충만하다고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진심으로 공경하는 마음이다. 산중에서 5년 동안 부모님의 묘소를 지키고 있는 범수씨는 세상 모든 가치가 변하더라도 결코 변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효라는 사실을 이 땅의 모든 자식들에게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