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수행평가 결과물을 제출하지 않는 학생들이 있어 그들을 교무실로 부른다. 선생님과 상담을 마친 대개의 학생들은 "선생님, 수고하십시오."라고 정중하게 인사를 한 뒤 교무실을 나간다. 아마도 수행평가를 뒤늦게 제출해서 죄송하다는 심정을 그런 인사말로 표현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이런 인사말은 차라리 안 하니만 못하다. '수고'란 원래 받을 '수(受)' 쓸 '고(苦)' 자를 쓰는 불교 용어로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만 쓸 수 있는 인사말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이 사전에 명시적으로 설명되어 있진 않지만 관습적으로 통용되는 예절이다. 선생님들도 힘든 행사를 마치고 "교감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인사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결례가 된다. 그냥 "감사합니다." 정도면 충분하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뭐든지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한 법이다. 인사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지나치게 예의를 차린다고 아무한테나 '수고'하라는 말은 삼가야 한다.
학생들 사이에서 "수고하십시오."란 말과 함께 남발되는 게 또 하나 있다. 바로 "죄송합니다."란 말이다. 직업이 남을 가르치는 교사이다 보니 학생들에게 매번 좋은 말만 할 수가 없어 가끔은 어쩔 수 없이 야단치기도 한다.
해당 학생들과 대화해보면 꼭 이들 사이에 나타나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고개를 숙이며 "죄송합니다."란 말부터 꺼낸다는 점이다. 그럴 때마다 내가 그 학생들에게 묻는 말이 있다. "도대체 뭐가 죄송하단 거니?" 그러면 또 학생들은 묵묵부답이다. 자기가 무슨 죄송한 짓을 했는지 따져보지도 않고 무턱대고 죄송하다고 말해버리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시인하고 선생님께 용서를 구하는 것은 학생으로서 아주 바람직한 자세다. 하지만 자신의 잘못도 모른 채 선생님 앞이라고 해서 또 권위에 눌리어 무조건 죄송하다고 굽히고 들어가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체면과 자존심을 목숨보다 중시하던 전통이 있다. 그 옛날 선비들의 꼬장꼬장한 기개를 보라. 오죽하면 목을 칠지언정 머리칼은 자를 수 없다고 들이대었겠는가. 다르게 생각해보면 이것은 부러질지언정 굽히지는 않겠다는 인간 존엄성의 발로인 것이다.
그저 아무 때나 비굴하게 "죄송합니다."라고 생각 없이 말하는 것은 자제되어야 한다. 왜냐, 이것은 자기 비하의 심정에서 나오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