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설시비처럼 해년 해마다 들려오는 스승의 날이 드디어 수업조차 하지 않고 휴무하는 날로 정해져 마치 학교가 국장을 치루는 날인가 착각을 할 정도다. 스승의 날로 정해져 있는 날을 더욱더 값있게 가꾸어 가지 못한 것이 어느 한 개개인에게만 지울 수도 없는 것이지만 더욱 안타까운 것은 교사와 학부모 사이에서 오가는 선물이 문제시되기 때문에 학교가 휴무까지 해야 한다는 것은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선물문화가 뿌리깊이 박혀있는 사회구조문제를 진단하고 지나가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문화란 한 순간에 변하지 않는 것을 학교가 휴무를 하면서까지 학부모의 선물공세를 피해야 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정이 있는 민족이기에 좋다고 평할 수 있으나, 또 한편으로는 서구의 철저한 개인주의 책임정신을 배우지 못한 것에도 경종을 울리지 않을 수 없다.
베품은 학습내용이다
현재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웰빙 건강에 직면해서 찐 살을 빼어 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추세라는 것은 이제 보편화된 뉴스인지도 모르겠다. 가난과 배고픔이 난무한 시대에는 빵 한 조각이, 돈 몇 푼이 귀중했다. 그러기에 학교사회도 교사에게 충분한 보수를 주지 못했던 것도 학부모의 촌지가 달콤한 향기로 여겨졌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1980년대까지 학교사회에 학부모의 치마 바람으로 통하던 것이 아닌가 기억된다.
그것도 한 순간. 교사들의 경제적 수준이 높아가고 학부모의 교육수준이 높아만 가기 시작함에 따라 학교 교사가 학원의 교사보다 수준이 미숙하다고 하는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돌출하곤 했다. 이에 학부모로부터 학교는 도전받기 시작하였고, 학생과 학부모는 학교를 불신하기에 이르렀다. 교사의 전문지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또 학생은 대학에 필요한 지식을 필요로 하는 교사를 찾기 시작했다. 이에 비도구과목은 학생들로부터 외면당하기 시작했고, 교실은 학생들이 잠자는 침실로 변해갔다. 학교는 오로지 대학에 필요한 자격증을 따는 곳. 대학에 필요한 지식은 학원 강사나 개인 과외교사로부터 받는 것이 돼버린 기현상도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이제 교사는 베품이 수업료를 못 낸다고 한 개인의 학생에게 수업료를 내 주는 그런 아기자기한 정적인 일에 신경을 곤두세울 시기가 아님이 되었다. 교사는 전문지식을 갖추어 가는데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자신의 연구력에 더 박차를 가할 필요성을 느낀다. 머리가 길다고 담임이 책망하는 경우 학부모로부터 사회 인권단체로부터 핍박받는 상황에서 학생들의 인권에 해가 되는 일은 교사로서 앞장 서는 것은 자제해야 할 것은 아닌 지. 지금의 체제에서 교사가 학원교사의 수준을 능가하는 상황으로 치닫지 않는다면 교사는 교단에서 계속 학생들의 요구에 시달림을 받을 수도 있다.
대학에서 강의 평가제를 시행하듯이, 고등학교에서도 학생들이 자신들의 요구에 맞는 학습을 요구하는 추세가 점차 늘어만 간다. 사실 중고등학교 단계에서는 교사가 주체가 되어 학생들을 이끌어 가는 전천후 지도가 이루어져야만 학교의 교과과정을 원활하게 소화해낼 수 있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이다. 어설프게 학생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지나칠수록 과도기에 있는 우리 사회의 교육의 과정은 어디로 갈 것인지가 아쉬울 뿐이다.
사랑은 전인교육이어야 한다
교사가 사랑을 베푼다는 것은 감성의 정에 호소하는 그런 것은 이제는 아닌 것 같다. 사랑은 전인교육을 위해 초석을 갖춘 상담교사로서의 자질이다. 그러기에 사랑은 학생들을 가르치고 이끌어 가는 정적인 이미지보다는 인간의 감성을 동적으로 변화시켜 나아갈 수 있는 전문화되고 다양화되는 시대성 사랑의 이미지가 학생들에게 베풀어져야 한다. 학생의 사랑은 교사의 화수분처럼 시대에 맞는 전문화된 교과 지식과 다양한 연구력이 담겨 있어야 수업의 자유자재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생각도 해 본다. 문제화되는 학생을 전문가적 소양을 갖추어 진단해 내는 책임의식과 학생 개개인의 개성을 파헤쳐내는 예리함도 우리 시대에 있어야 할 진정한 담임으로서의 의식이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