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이 다가오면서 보충수업 수강신청이 한창이다. 지난해부터 ‘맞춤형 보충학습’이란 명칭으로 시작된 이 제도는 학생들이 별도로 마련된 수강신청용 홈페이지에 접속하여 선생님들이 탑재한 강의계획서를 꼼꼼히 살펴보고, 자신의 수준과 적성에 맞는 과목을 선택한다. 비록 보충수업에 한정되지만, 학생들이 선생님을 직접 고른다는 점에서 파격적인 제도라 할 수 있다.
학년이 달라 정규수업 시간에 만날 수 없는 교사라 하더라도 강의를 잘한다는 입소문이 나면 그 강좌는 밀려드는 학생들로 인하여 순식간에 제한인원이 마감된다. 반면에 교사의 강의 수준이 떨어지거나 학습 동기 유발이 부족한 것으로 알려진 강좌는 신청자가 없어 곧바로 폐강된다.
‘학생 선택권’이란 옥동자를 얻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일부에서는 그 동안 별 탈없이 진행되었던 제도를 굳이 ‘학생 선택’이란 듣기 거북한 용어를 앞세워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있겠느냐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으나 궁극적으로 수요자 중심의 교육을 지향한다는 시대적 요구와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막상 시행이 결정되자, 과거의 방식에 익숙했던 선생님들 가운데는 “아이들의 선택을 신뢰할 수 없다.” “수업을 가장한 인기투표”라는 등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몇 해전만 하더라도 주요과목(일명 국영수)을 맡고 있는 교사라면 보충수업에서 제외된다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당장 대학진학에 필요한 과목부터 시수를 배정하는 관례에 따라 오히려 시수가 많아서 불평할 정도였다.
정규수업과는 달리 수익자 부담의 원칙이 적용되는 보충수업은 참여한 교사들에게 일정한 수당을 지급한다. 그래서 한 때는 보충수업을 두고 교사 복지 차원의 배려가 아니냐는 말도 있었다. 그만큼 수업의 질보다는 잿밥에 관심이 많았다는 얘기다.
‘맞춤형 보충수업’이 시행 2년째로 접어들면서 당초 우려와는 달리 빠르게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눈에 띄게 드러난 변화 가운데 하나는 보충수업을 준비하는 교사들의 자세다. 오랜 지도 경험으로 해당 교과목에 능통한 교사들도 한 시간의 수업을 위하여 몇 시간씩 정성을 들이는 모습이 곳곳에서 확인된다. 과거처럼 시간 때우기 식의 안이한 수업으로는 다음 수강신청에서 학생들의 낙점(落點)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수업에 임하는 학생들의 자세도 몰라보게 달라졌다. 자신이 직접 수강 과목과 지도교사를 선택했다는 책임의식 때문에 그만큼 진지할 수밖에 없다. 불과 삼 년전만 하더라도 오후 늦게 진행되는 보충수업은 피곤에 지친 학생들이 꿈나라를 오가는 시간이었으나 이제는 정규수업시간보다도 오히려 더 진지한 자세로 수업에 몰두한다. 한 마디로 학생선택이 불러온 선물이다.
변화를 받아들이는 개인의 가치 판단은 치즈를 놓고 벌이는 생쥐와 꼬마 인간 ‘허’와 ‘헴’의 이야기를 담은 스펜서 존슨의 ‘누가 내 치즈를 옮겼는가’를 보면 실감할 수 있다. 작가는 과거의 영화를 과감히 떨쳐버리고 새로운 치즈를 찾아나선 생쥐와 뒤늦게나마 현실의 변화를 받아들인 ‘허’에 비해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선택의 기회를 놓친 ‘헴’을 통하여 변화의 흐름을 읽지 못한 현대인을 강하게 질타하고 있다.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의 저자 리차드 프리드먼도 세계화의 흐름을 놓치고 섣부른 애국주의에 빠진 사람일수록 가장 먼저 아웃소싱당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학생들의 수강신청이 끝나면 이번 여름방학에 집에서 쉬어야할 선생님들도 있을 것이다. 시장의 윈리가 게재된 ‘학생 선택’은 이처럼 냉정한 것이다. 어차피 교육도 ‘투자’와 ‘수익’의 원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 이미 시범 실시중인 교원평가제도 언젠가는 ‘정규 수업’의 ‘학생 선택권’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을 것이 분명하다. 문제는 변화를 받아들이는 교사들의 의식이다. 맛있는 치즈와 안정된 일자리를 언제까지나 보장받을 수 있다는 환상은 빨리 벗어날수록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