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시 1차 합격자가 계속 발표되고 있는 요즘 고3 교실은 기쁨과 슬픔이 교차되는 시간이 연이어 계속되고 있다. 한쪽에선 “합격이다” 아우성이고 또 한쪽에서는 “불합격이다” 아우성이다. 수시 1차가 학생들의 학습권을 빼앗아 간다고 수시 1차를 없애야 한다는 소리가 “한국교육신문”에 메아리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수시 1차를 폐지한다고 교육부에서 발표한 적이 있다. 사실 수시 합격자가 많은 학교에서는 이 학생들을 지도할 교사를 선정하는 데서나 이들만을 위한 프로그램에서나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고3 년생의 꿈의 이정표
많고 많은 꿈 중에서 그래도 합격의 기쁨만큼 크게 희망을 주는 것은 없는 것 같다. 합격이 되면 부모에게는 자랑거리도 되고 타인에게는 자극제가 되게 할 수도 있고, 나아가서는 집단에 대한 홍보도 되고, 더 크게는 자아를 실현시키는 첩경이 된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현실에서 이루지 못하는 꿈은 상상의 세계에서 종종 펼쳐가기 마련이다.
김만중의 소설 “구운몽”은 바로 그러한 면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소설이다. 꿈은 순수할 때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고 이상은 실현가능할 때 현실에 다가오기 마련이다. 민태원의 수필 “청춘”에서 “이상은 우리의 청춘이 가장 많이 품고 있는 이상”이라고 하였다. 사람은 크고 작고 간에 이상이 있으므로 용감하고 굳세게 살 수 있는 것이다. 석가가 설산에서 고행을 한 것도, 공자가 천하를 철환한 것도, 예수가 광야에서 방황한 것도, 모두가 자기만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만 천하를 대중을 품에 안고 그들에게 밝은 길을 찾아주고 행복과 평화가 넘치는 그런 곳을 만들어 주기 위한 커다란 이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커다란 이상과 거대한 야망! 젊은이는 가지고 가기에 무겁지도 않고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는 중용의 무게를 짊어지고 때로는 평탄한 길을, 때로는 비탈길을, 때로는 포장도로를 가면서 그 목적지에 도달해야 한다.
학업도 마찬가지다. 때로는 지루하고 때로는 무덥고 때로는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러운 때도 있다. 하지만 학업을 하는 것은 자신만의 영달을 위한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인류만을 위한 것도 아니다. 학업은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초석을 만들기 위한 것이 첫째요, 둘째는 자신의 자아를 실현시키기 위함이요, 셋째는 자아성취를 통해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아가서는 사회에 이바지하고 더 나아가서는 인류사회에 한 사람으로서의 공헌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배움이 주는 무한의 가치는 어떠한 말로도 다 형용하기 어렵지만 배움이 주는 결과는 결코 쉽게 나타나지 않고 오랜 세월을 두고 자기와의 싸움에서 얻어지게 된다.
현실에서 고3 학년 학생들의 실태를 보자. 대학생이 고3 학년만큼 공부를 한다면 한국의 대학생은 세계의 노벨상을 모두 탈 것이라고 혹자는 말하곤 한다. 아침 해가 떠오르기도 전에 학교에 등교하여 해가 져서 캄캄한 밤이 되어서야 귀갓길에 오르는 한국의 고3 년생의 모습은 옛 선비들이 과거를 준비하기 위해 찬물을 마시면서 상 앞에서 공부하는 것과 같은 형국인가 아니면 자신의 영달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것인가?
서울 소재 명문 대학에 합격만이 꿈이 아니기를
우리 사회에 소위 명문대라고 하는 대학을 졸업한 지성인들의 집단에서 터져 나오는 부조리한 모습은 그 연원을 어디에서 찾아야만 할까? 교육에서일까? 가정교육의 잘못으로 굳어진 인성 때문일까? 그 답을 찾아내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가정의 잘못된 인성은 학교 교육에서도 바로잡지 못하고 방치된 까닭이 첫째요, 둘째는 명문대라는 서울 소재 대학에만 진학해야 이 사회에서 그래도 정상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생각이 학생들의 뇌리에 아로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학교는 인성을 바로잡아 줄 당연한 의무가 있는데도 인성 교육보다는 학생을 학교의 명예의 수단으로 생각하고, 학생은 명문대를 소위 자신의 영달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각각 다른 속셈으로 움직이는 현실의 구조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직책에 있으면서 그 직책에서 헌신과 봉사보다는 자신의 안일과 영달만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기 때문은 아닌 지 생각해 볼 일이다.
고3 학생들을 곁에서 지켜보노라면 이들이 무엇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지 그 정체성을 구체적으로 간직하고 있기보다는 고3 학년이기에 한다는 의미가 더 숨어 있는 것 같아 교육자로서의 바람직한 자세를 되새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