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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4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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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한 아이도 아프지 않게

한 아이도 아프지 않게

-정채봉<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라> 를 읽고-

가녀린 코스모스 허리에 얹혀
벌써 가을을 이고 앉은 코스모스꽃들이
나그네의 시선을 붙드는 출근길 아침.

가을 열매들은 벌써 돌아온 자리를 찾아
심겨진 그날의 기억을 더듬어
연어처럼 회귀하는 날을 잰다.

큰 바람이 오기 전에
부지런한 벌레들에게
일찍부터 몸을 내맡긴 밤알들이
무엇이 그리 급한지 톡톡 굴러나온 산길.

아직은 여름이 물러가기 싫은 듯
태풍을 몰고올 구름들을
가득 입에 물고 하늘을 덮고 있다.

곱디 고운 때깔을 자랑하는 백일홍은
키 작은 봉숭아꽃, 맨드라미꽃을 타이른다.
"얘들아, 아직 우린 할 일이 남았단다.
아직 우린 가을을 지켜야 한단다.
상사화 꽃이 오는 날까지만 참자꾸나."

낮은 음계로 가을을 노래하는 계곡도
지난 여름 그를 사랑해주던 나그네를
그리며 아래로 아래로 여행을 가는 지금.

가을이 남기고 갈 지난 봄의 약속들이
밤나무마다 주저리주저리
세상 구경을 서두르며 속삭인다.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라'고

- 졸시, 가을 앞에서, 장옥순 -

가을이면 서가에서 잠자는 정채봉님의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라' 그 화두가 나를 잡아 이끈다. 이미 지상의 옷을 벗어버린 맑은 웃음 속에 슬픈 큰 눈을 하고서 환하게 웃던 인상 좋은 옆집 아저씨 같은 작가의 모습과 함께.

동화 같은 내용을 시처럼 행을 나눠 쓴 60여 편의 글. 바쁘게만 살아온 우리들에게 잠시나마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주고, 과연 우리가 바라는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 우리가 살아가면서 진정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 지를 말해 주고 있다. 세상 고통을 어루만지는 잠언과 우화가 삶의 가치란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고 노력할 때 찾을 수 있다고 우리에게 속삭이는 책.

언제 읽어도 좋은, 특히 여름을 보내고 열에 뜬 지친 영혼들에게 더 좋은 책이다. 작가의 따스한 눈매를 만날 수 있어서 좋은 그의 책은 추석날 말없는 눈웃음으로 반겨주시던 돌아가신 시아버님의 선한 눈매를 생각나게 한다.

아니면 수십 년이 흐른 뒤에 만나도 예전 모습을 간직한 오래된 친구같이 편안한 목소리로 금방이라도 손을 내밀 것같은 초등학교 단짝 친구처럼, 화장기 없는 얼굴로, 맨발로 만나도 좋을 만큼 아무때나 마음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책이어서 좋다.

사랑한다는 말보다는 좋아한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은 책. 작가의 숲에 들어서면 들꽃이 풍기는 흙냄새가 폴폴 풍겨나오고, 옆 집 강아지처럼 귀엽고 앙증맞은 단어들이 금방 세수를 한 듯 맑은 얼굴로 반겨준다.

나는 가을이면 늘 이 책을 찾곤 한다. 금방이라도 밤알이 튕겨나올 듯한 오솔길을 만날 수 있는 책, 앉은뱅이 민들레도 여왕처럼 귀한 대접을 받도록 해주는 책, 1%가 99%를 압도하는 경이를 만나게 해주는 신기한 언어의 마술을 만나게 되어서 슬픔이 기쁨보다 귀한 보석을 잉태함을 선물한다.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정채봉'이라는 사람, 가을이면 그의 체취가 배인 책'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라'를 찾아 가을 산행을 나선다. 가을은 오던 길을 생각해보는 계절이다. 나의 처음이 어디였으며 지금 어디쯤 가고 있는지, 처음의 내 마음의 결을 더듬어 돌아갈 길을 스스로에게 묻는 아픈 시간들을 겨울잠을 자기 전에 찾아야 하므로...

'물 한 방울도 아프게 해선 안 된다. 본래 살고자 했던 처음 마음을 변하지 말 것'을 다짐하며 세상 뒤로 떠나기 전에 병고 속에서 세상으로 밀어보낸 작가의 옥동자는 10년 가까운 세월의 무게에도 여전히 새 책 못지 않은 향기를 전한다.

(이 책은 교단에 처음 서던 날의 다짐을 생각나게 하는 책이어서 참 좋습니다.
물 한 방울도 아프지 않게 하라는 작가의 외마디는 '한 아이도 아프게 하지 말라'는 경구로 들립니다. 이른 밤알이 툭툭 떨어지는 산길, 코스모스꽃이 흔들리는 출근길에 꼭 읽어보고 싶어 서가를 뒤져 찾은 책입니다. 귀향을 서두르는 추석이 오기 전에, 한 해가 다른 어버이의 모습을 슬프게 안고 오는 가을에 생각나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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