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노량진 시장에서 젓갈장사를 하고 있는 류양선 할머니(74). 1998년 상가와 임야를 포함해 시가 10억원 상당의 재산을 한서대에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의 장학금으로 내놓은 데 이어 또다시 제주도 금싸라기 땅(1500평)을 같은 대학에 기증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공동체인 경기 광주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고 있는 김군자 할머니(82). 과거 일본군 종국 위안부였던 할머니는 국가와 지자체로부터 받는 월 85만원의 생활안정 지원금을 사용하지 않고 ‘아름다운 재단’에 고아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내놓았다.
6.25 참전 후유증을 앓던 남편을 먼저 보낸 뒤 폐지 수집을 하며 근근히 생계를 잇고 있는 정성란 할머니(82). 할머니는 고작 몇 천원을 벌기 위해 점심까지 거르며 하루 종일 리어카를 끌고 폐지를 수집하여 모은 돈을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위해 써 달라며 장애인 단체에 기부했다.
모두 황금 벌판처럼 넉넉하고 풍성한 이야기다. 기부는커녕 자식에게 편법으로 재산을 증여하거나 값비싼 명품만 찾는 일부 부유층의 사치풍조 등 세상이 온통 이기적 욕망으로 들끓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 할머니들의 아름다운 선행이야말로 실로 가뭄속의 단비처럼 시원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무역 규모가 세계 10위권에 근접할 정도의 국력을 갖춘 국가라면 당연히 그에 걸맞는 공동체 의식을 갖춰야 함은 불문가지다. 선진 사회는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에게도 따뜻한 이웃이 있다는 확신을 통하여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재기할 수 있는 용기를 심어 주는 데 있다.
그런면에서 국력의 차이는 있지만 미국의 기부문화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미국인들은 ‘사회에 단비를 내리게 하는 사람’이란 뜻의 레인 메이커(자선사업가)를 가장 명예로운 직업으로 여긴다. 그래서 자선단체를 비즈니스, 정부와 함께 ‘미국을 움직이는 3대 동력’으로 꼽는다. 철강왕 카네기는 비즈니스로 번 돈을 자선사업에 쓰기 위해 재단을 설립하여 거액을 투자했으며, 세계에서 두 번째 부자로 손꼽히는 워렌 버핏은 재산 85%를 자선단체에 쾌척했고, ‘헤지펀드의 대부’로 불리는 조지 소르소도 빈곤 퇴치를 위해서 5,000만 달러를 내놓았다.
한국 국민 1인당 연간 기부액(5,800원)은 미국 국민 한 사람이 한 해 동안 기부하는 금액(70만원)의 10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마저도 자연스런 기부문화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각종 재난이 발생했을 경우 성금 형식으로 거출된다는 점에서 자선이 아니라 구제 수준에 머물고 있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기부문화를 다시 한번 점검하고 보완할 필요가 있다. 기부금의 경우 제한 규정 없이 세금감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책을 확대하고, 기부 방법이나 절차를 모르는 일반인들이 손쉽게 참여할 수 있도록 세계 최고 수준의 IT인프라를 기부문화와 접목하는 것도 현실적인 방안이 될 수 있다.
그 옛날 우리 조상들은 과실을 거둘 때도 가지 끝에 까치밥을 남겨 두었다. 비록 살림살이가 어려울 지라도 짐승을 생각할 만큼 우리 조상들의 인심은 훈훈하기 그지없었다. 평생 김밥 행상으로 번 돈을 외아들에게 상속하는 대신 충남대에 장학금으로 내놓아 ‘김밥 할머니’로 유명해진 고 이복순 할머니의 마음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참여정부가 양극화 해소에 정책의 주안점을 두고 있으나 이를 추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국가가 아무리 애를 써도 그늘진 곳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은 있게 마련이다. 빌게이츠는 빈민 구호와 질병 퇴치를 위해 자신이 설립한 재단에 무려 2백 40억 달러라는 거금을 내놓으며 “돈을 효율적으로 쓰는 것이 버는 것보다 어렵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우리에게 당장 빌게이츠같은 기부자는 없어도 기막히게 번 돈을 이웃을 위해 아낌없이 내놓은 할머니들이 있다. 사랑은 나눌수록 커진다는 말처럼 나눔의 미덕이 꽃향기처럼 넘쳐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