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원평가제 문제를 놓고 교원단체와 교육부 간의 주도권 싸움은 마치 흑백 고양이가 먹이를 놓고 쟁탈전을 벌리는 것 같아 뒷맛이 씁쓸하기만 하다. 교육부는 무엇이 그리 급해서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이 일을 추진하는가? 왜 워밍업이 없나? 어느 한 지역에 이 제도를 시범적으로 실시해 보고 그것을 토대로 설득력 있게 스텝 바이 스텝으로 나아간다면 과연 설득력이 약해서 교원들이 반대할까? 결코 아닐 것이다. 우리는 너무 조급한 것이 문제다. 교육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는 물건이 아니다. 시간을 두고 꾸준하게 추진해 나가는 그런 여유를 우리 교육에서 찾을 수 없는 것도 너무 많은 외침을 받아온 역사적 결과 때문일까?
우리 교육계는 사각의 링 안의 선수와 같다
사각의 일을 두고 혹자는 “고대 원시사회의 사람들의 투쟁의 축소판이다”라고까지 한다. 고대인들은 현대의 전자 장비를 갖추고 있지 않아 싸움을 하는 데 있어서도 육탄전 아니면 접전으로 승부를 가렸다. 부족한 장비에 멀리 뻗어가지 못하는 화살은 상대를 보고 쏘지 않으면 상대를 넘어뜨리지 못한다. 그러기에 그들은 힘이 있어야 하고 그래야 오랫동안 싸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힘이 바로 오늘의 사각의 링에서 부활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의 교육계 현실은 어떠한가? 마치 사각의 링을 연상시키지 않는가? 주도권 싸움을 위해 판을 벌리는 추태는 교육 현실에 대한 시선을 더욱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만성적인 교육문제를 어느 누구 속 시원하게 해결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이어져 왔건만, 이제는 목소리 큰 자가 주인이 되고 힘이 센 자가 으뜸이 되는 세상으로 변질되어 가는 현장을 보고 있노라면 민주화를 외치고 개혁을 외치는 주체들이 한 행위들이 과연 타인을 위하고, 남을 위한 봉사에서 헌신에서 나온 것이었을까? 지금에 이르러 강하게 되묻고 싶어 진다.
권투 선수와 레슬링 선수가 같은 링에서 싸움을 한다면 누구 과연 이길까? 권투 선수는 상대에게 글러브를 끼고 하자고 우기고, 레슬링 선수는 손으로 때리지 말고 하자고 우기면 두 선수 간의 정정당당한 싸움이 될까? 선수는 승부를 위해 싸우고 관중은 흥미를 위해 관전한다. 그런데 선수 간에 싸움도 없이 한쪽에서는 글러브를 사용하자고 우기고, 다른 한쪽에서는 손으로 때리지 말고 싸움을 하자고 우긴다면 관중들은 선수들을 향하여 박수를 치기보다는 야유를 퍼붓고 자리를 떠날 것이다. 심지어는 관람료 환불까지 외칠 것이 아니겠는가? 오늘의 교육 판도는 이와 다르다고 말할 뚜렷한 대안이 있는가?
우리 교육계의 새 지평선은 타협과 양보다
교육은 대상을 가르치고 기른다는 포괄성을 띤 용어다. 대상을 잘 가르치기 위해서는 자신을 내세우기보다는 타인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앞서야 하는 양보하는 미덕이 있어야 하고, 잘 기르기 위해서는 대상이 좋아하는 기호품을 제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상이 좋아하는 기호품이 어디에 있는 지 찾아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기르고 가르치는 것이 말로써는 쉽지만 실제로 행하기에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교육 현실을 놓고 교육 정책을 펼쳐 나갈 때도 그 정책 또한 많은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다. 시련을 겪으면서도 결국은 좋은 결실을 거두면 좋지만 그 반대가 될 때는 노력 소비, 인력 낭비, 예산 낭비 등등이 부작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것은 고스란히 국민들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어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