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들이 가슴 설레이며 기다렸던 새천년을 한 해 앞둔 1999년쯤의 일로 기억된다.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 하에서 교육 수장으로 임명된 이해찬 전 장관은 교육 개혁을 내세워 ‘방과후 학습’(이 글에서는 ‘보충수업’과 ‘야간자율학습’을 말함)을 폐지했다. 서로 좋은 대학교에 가기 위한 이기심이 과도한 교육열을 초래했고, 급기야 학교마다 경쟁적으로 강제적 ‘방과후 학습’을 시행함으로써 교육의 공공성을 훼손하고 학생의 인권을 유린했다는 논리였다.
이해찬식 교육정책은 특유의 강한 추진력을 바탕으로 교육 현장을 강타하며 보충수업과 야간자율학습을 금지하고 특기적성교육을 내세워 한 가지 분야만 잘 하면 대학에 갈 수 있다는 공수표를 남발하기에 이른다. 당시의 혼란스러웠던 상황은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교과 수업을 배제한 특기적성교육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리 만무했고, 결국 정규수업이 끝난 학생들은 아무런 대책없이 학교 밖으로 내몰리기에 이르렀다.
당장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을 금지하면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학습 환경을 만들어 적응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특히 사교육 인프라가 취약한 지방의 학생들은 마땅히 갈 만한 학원도 없었고 그렇다고 고액 과외를 할 수 있을 형편도 아니었다. 결국 무작정 거리를 배회하는 아이들이 늘어나면서 새로운 사회 문제로 부각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학교를 다닌 학생들은 훗날 ‘이해찬 세대’라 불리며 이태백(‘이십대의 태반이 백수’의 준말)의 주역이 됨으로써 두고두고 곤혹을 치르게 된다.
이해찬 전 장관이 장관직에서 물러난 뒤, ‘방과후 학습’은 다시 원상태로 돌아갔다. 굳이 학교가 나서지 않아도 고삐풀린 아이들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학부모들의 위기의식이 결국 ‘방과후 학습’ 부활로 이어진 것이다. 특히 지방일수록 그와 같은 요구는 더욱 거셌다. 세계화 시대, 교육도 치열한 경쟁을 펼칠 수밖에 없는 현실적 상황을 무시하고 이상적인 명분에만 집착한 근시안적 정책 실패가 부른 뼈아픈 교훈이었다.
최근들어 일부 교육단체가 중심이 되어 아이들에게 건강권,자치권,인권을 돌려줘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아이들 살리기 운동’을 전개하고 나섰다. 체벌을 금지하는 등 학생들의 인권을 보장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으나 자율적인 학습권 보장을 명분으로 또다시 ‘방과후 학습’ 금지를 내세운 것은 실패한 정책을 반복한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많다. 교육에 문외한이라 하더라도 아이들을 존중하고 인정하자는 주장을 모를 리가 없다. 그렇지만 현실적 대안도 없는 상태에서 무작정 금지부터 하고보자는 식의 주장은 수긍하기 어렵다.
‘방과후 학습’은 대도시와 지방의 교육 격차를 그나마 완화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라 할 수 있다. 서울을 비롯한 사교육 인프라가 풍부하게 갖춰진 대도시 지역에서는 굳이 ‘방과후 학습’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지방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마땅히 학생들을 수용할만한 교육 인프라도 없는 상태에서 무작정 ‘방과후 학습’을 폐지한다면 이는 지방 교육을 고사시켜 대도시로의 교육 종속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학교가 ‘방과후 학습’을 통하여 학생들을 수용하는 것은 사교육비로 인한 가정경제의 어려움을 해소하는 요인도 있다. 보충수업은 수익자 부담의 원칙에 따라 최소한의 비용으로 필요한 과목을 수강할 수 있고 자율학습은 감독 교사가 있으나 대부분의 학교에서 시간외근무로 처리하고 있기 때문에 별도의 비용이 들어가지 않는다. 만약 학생들의 자율적 학습권을 보장하기 위하여 ‘방과후 학습’을 금지한다는 결정이 내려지더라도 대부분의 학부모들이 자녀들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교육비는 더욱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나마 ‘방과후 학습’으로 인하여 학생들의 탈선과 교육비 부담이 줄어들었다는 점에서 지방의 학부모들은 금지는커녕 오히려 더욱 강화하길 바라고 있다.
학교를 일컬어 공교육 기관이라고 칭하는 것은 영리를 추구하는 사설 교육 기관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한창 성장기에 있는 학생들에게 수준에 맞는 지식을 가르치는 것은 물론이고 타인과의 바람직한 인간관계나 삶의 과정에서 겪게 될 난관을 지혜롭게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가르치는 것도 역시 학교가 담당할 몫이다. 한창 정신적으로 성장 단계에 있는 청소년들이 자율이 주어졌을 때 자신을 통제하여 생산적으로 시간을 활용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다. 그런 면에서 ‘방과후 학습’은 학생들에게 적절한 학습 여건을 학교가 나서서 제공한다는 의미 이외에 개인적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인고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는 장점도 있다.
‘방과후 학습’은 국가나 일부 교육단체가 나서서 왈가왈부할 성격이 아니다. ‘방과후 학습’을 금지한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교육 자율을 훼손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비교육적인 발상이라 할 수 있다. 학교마다, 지역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그에 적합한 교육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오히려 자율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필자가 근무하는 학교에서는 2년 전부터 학생들이 인터넷 수강신청을 통하여 자유롭게 보충수업을 선택(교사 선택도 가능)하고 있으며, 야간자율학습도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 어느 누구도 선택을 강요하지 않기 때문에 본인의 의사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보충수업과 야간자율학습에 참여하고 있다. 이제 지방에서도 과거처럼 일방적으로 학생들에게 보충수업이나 야간자율학습을 강요하는 학교는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방과후 학습’으로 인하여 교사의 부담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로 인하여 얻는 보람도 무시할 수 없다. 정규수업이 끝나면 학원으로 몰려가는 대도시의 아이들과는 달리 학교를 믿고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에 참여하는 아이들을 보며, 비록 저녁달 보고 퇴근하는 어려움이 있더라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가끔 졸업한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 하는 일이 있다. 매일 반복되는 보충수업과 야간자율학습으로 인하여 당시는 매우 어려웠지만 그런 수고로움이 있었기에 목표를 이룰 수 있었다고 회고하는 제자들을 보며 ‘방과후 학습‘이 그들에게 보약이 되었음을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