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학교 교문 왼편에는 약 백년이 넘는 은행나무가 한그루 있다. 올봄 부임당시 나뭇가지를 많이 잘라내어 덩그러니 서있는 모습이 보기에 좋지 않았다. 분명 나무에 이상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사연인즉 은행나무가 고사(枯死)되어가는 증상이 나타나서 지난해 동문회에서 은행나무를 살리기 위한 성금을 모아 나무병원에 의뢰하여 치료를 하였다고 한다.
나무가 병든 원인은 교문담장을 만들기 위해 시멘트콘크리트로 기초를 한 것이 원인이었다고 한다. 나무뿌리에서 맑은 물과 영양분을 빨아드려야 나무가 잘 자랄 텐데 시멘트의 독성이 뿌리를 상하게 하여 뿌리를 살리는 치료를 하고 영양제도 놓았으며 가지치기도 하였다고 한다. 올 여름방학에는 시멘트담장을 헐고 콘크리트기초를 캐내어 새로운 흙을 넣고 자연석을 쌓아 교문을 자연친화적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노력 덕분으로 은행나무는 녹색의 잎이 살아나오고 있어 고사 직전에서 건강을 회복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교육도 이 은행나무처럼 시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면 아무리큰 나무도 눈에 보이지 않는 뿌리, 그중에서도 작은 실뿌리가 수분과 영양분을 빨아드려 공급해주어야만 싱싱한 잎이 나오고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는 법이고 튼실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교육이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훌륭한 인재를 키워내려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실뿌리를 잘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실뿌리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태아에서 세살까지 교육이 이에 해당 될 것이고 가정교육과 기초교육이 뿌리에 해당하지 않을까? 학생들에게 교육을 하는 이 나라의 교사들도 뿌리역할을 하는 매우 중요한 자리라고 생각한다.
우리교육현실을 살펴보면 이런 분야보다는 모든 사람이 대학을 가야하고 학생들의 타고난 소질과 꿈은 간과한 채 소위 일류대학에 몇 명을 합격시키느냐에 교육이 정점에 서있고 모든 교육이 지식위주의 입시교육에 맞추어져 있어 지덕체(智德體)의 조화로운 인간을 기르는 균형을 잃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다. 땅속에 보이지 않는 뿌리는 무시된 채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아름다운 꽃과 열매만 따려고 온갖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모습에 비유된다. 공교육 보다는 사교육에, 역사교육보다는 컴퓨터교육에, 국어교육보다는 영어교육에 인생을 걸고 외국유학과 어학연수를 보내며 과열경쟁 속으로 몰아가는 모습을 보노라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씨앗은 작지 않은가? 그러나 작은 씨앗을 잘 관리하여 튼실한 싹을 틔워야 성장이 잘되고 좋은 결실을 볼 수 있는 것처럼 태교에서부터 세 살까지의 가정교육이 매우중요하다는 것은 알지만 이 분야에 대한 교육은 너무 미흡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유아교육도 성장발달에 알맞은 교육보다는 지나친 교육열에 새싹이 웃자라거나 잘못 자라고 있지 않는지 점검해보아야 하고 기초교육인 초등교육도 정체성을 키우며 조화롭게 이루어지는지 진단해 보아야한다. 유아교육과 초등교육은 아이들이 어리다고 소홀히 생각하여 뒷전으로 밀려서는 안 된다. 아름다운 소나무분재도 실뿌리가 나무의 생(生)과 사(死)를 결정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동안 정권이 바뀔 때 마다 교육을 고쳐보겠다며 수많은 교육공약을 내세워 강력한 개혁을 추진해 왔으나 우리교육이 건강하게 발전되었다고 생각하는가? 그것도 비전문가가 교육개혁을 하려했으니 정확한 진단에 기초하지 않은 개혁으로 교육이 지치고 시들어가고 있다면 너무 비관적인 표현일까? 눈에 보이는 한건주의에 빠져 기초 보통 교육보다는 고등교육에 치중하였고 교육일선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육자들의 사기를 북돋워주기 보다는 개혁의 대상으로 삼아 스승의 권위를 심각하게 손상시켰으며 너무 많은 간섭을 하여 학교현장은 안정보다는 불안감을 안고 교단이 흔들리고 있어 공교육이 설자리를 점점 잃어가고 있다. 정권차원에서 교육을 고치려면 현장의 소리를 수용하여 학교현장이 신바람이 나도록 교사의 사기를 올려주는 일(치료)을 해야만 교육의 실뿌리는 생기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고 아름다운 꽃과 알찬 열매를 수확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