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방학 보충학습이 시작되었다. 대다수의 인문계 고등학교에서는 몇 백 시간을 꾸려 아이들과 선생님들에게 곤욕 아닌 곤욕을 치르게 한다. 입시라는 장벽이 항상 도사리고 있는 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임을 교사나 우리 아이들은 대부분 직시한다. 그러기에 출근길이 더 힘들게 느껴진다.
차를 몰고 학교로 가면서 내내 ‘이런 고역을 언제까지 해야 하나’라는 공연한 불만들을 삼켜본다. 아침 공기가 몹시 차가움을 느끼게 한다. 정작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대다수가 하기 싫어서 억지로 나오는 아이들을 보면 ‘정말로 그들을 위한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강제 아닌 강제가 되어 버린 방학 보충학습, 하지만…
방학이 되기 전에 아이들의 보충학습 참여를 독려하느라 담임선생님들은 정말로 진땀을 뺀다. 특히 본교와 같은 시골의 인문계 고등학교는 공부에 별로 관심이 없는 대다수의 아이들로 구성되어 있는 처지라 더더욱 어려움이 많다. 하지만 관심이 없을수록 더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독려하는 차원에서 선생님들은 손을 놓을 수 없는 것이다.
“말도 말아요, 조사해 보니까 우리반은 보충학습 희망자가 3-4명밖에 나오지 않아요. 무조건 아이들의 의견을 묵살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아이들의 의견만 들어줘서는 안 될 것 같아요. 특히 우리 학교와 같이 여러 가지로 입시 준비에 부족함이 많을수록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 필요한 것 같아요.”
“어디 교사나 아이들이나 요즈음 방학이 어디서, 초등학생 때부터 입시 준비 한다고 야단들인데…” “맞아요, 그런 분위기가 사뭇 동떨어져 있는 우리 아이들만 불쌍하죠.”
대다수의 선생님들은 보충학습에는 반대하면서도 열악한 교육환경에 처해 있는 우리 아이들의 상황에 연민과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렇기 때문에 보충학습의 필요성도 때론 대다수 학생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생님들 사이에서는 강조되기도 했다.
방학을 앞두고 아이들과 전쟁을 하다!
방학을 며칠 앞두고 방과 후 학교 보충학습 담당자로서 아이들과의 마찰을 최대한 줄여보려고 했지만, 부득불 보충학습에 참가하라고 강권하는 바람에 다툼 아닌 다툼을 하게 되었다.
“선생님, 제발 방학 때는 집에서 쉬게 좀 해 주세요. 학기 중에 방과 후 학교 때문에 보충학습 많이 해잖아요.” “이놈아, 다른 지역의 아이들은 방학이라 더 긴장해서 학기중에 못한 공부들을 하느라고 다들 야단인데….” “선생님, 그냥 놔 두세요. 전 이번 방학때는 정말로 일이 있어서 학교에 못 나와요. 방학 끝나고 봐요.”
대다수의 아이들은 미리부터 나의 강요 아닌 강요를 피해가기 위해 별의별 핑계를 다 만들고 있었다. 특히 큰 도시의 학원에 간다거나 혹은 집에서 과외를 한다거나 하는 등의 핑계로 넘어가려고 하는 것이었다. 실상은 대다수가 집에서 빈둥거리나 그렇지 않으면 친구들과 어울려 놀러 다니기 일쑤였다.
“뭐, 서울에 공부하려 간다고…” “예, 선생님, 누나가 서울에 있는데 방학 때 서울에 와서 학원 다니라고 해서…” “평소에도 책과 담을 쌓고 있는데, 방학 때 서울가서 한다고 제대로 공부가 되겠니.” “분위기라도 바꿔 해 보려고요.” “비용이 꽤나 들건데, 그리고 너의 수준에 맞게 가르쳐 주는 학원이 있을지나 모르겠다.”
선생님, 꼭 1교시부터 참석해야 하나요?
아이들과 보충학습 때문에 전쟁 아닌 전쟁을 치르고 있는 와중에 유독 눈에 띄는 한 아이가 있었다. 중학교 때 성적이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가정 사정으로 본교에 진학해서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아이였다. 장학금이 아니라면 정말로 학교에 다니기 어려운 정도의 아이였다.
“선생님, 저도 방학 보충수업에는 참석하지 못하겠는걸요.” “뭐라노! 너라도 없으면 선생님이 어떻게 수업을 하겠노.” “참석은 하고 싶은데, 방학 때 저희 동네에는 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너무 적어 차량 운행을 하지 않는데요.”
대다수의 아이들은 그 아이의 말을 유심히 듣고 있었다. 성적도 우수했고, 많은 아이들에게 귀감이 될만한 품성도 지니고 있었기에 장난스러이 듣지 않는 것이었다.
“선생님 맞아요, ○○ 동네에는 방학 때는 차가 하루에 몇 번 운행하지 않는데요. 이른 아침이나 저녁이 되면 아예 차가 가지도 않아요.” “요즈음도 그런 동네가 있나.” “아이, 선생님은….”
방학 중에 이른 아침에는 학교로 운행하는 차가 없어 보충수업에 참가하지 못하겠다는 아이의 말을 듣고 농담 아닌 농담을 아이들에게 던지기는 했지만, 자꾸만 그 아이에게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는 나의 눈길이 그래도 ‘수업에 꼭 참석해야 한다’는 식으로 보였는지 부끄러운 듯 질문을 하는 것이었다.
“선생님, 그러면 2교시나 3교시부터라도 참석하면 안 되겠습니까.” “2교시나 3교시에 맞추어 올 수는 있겠니.” “그래도 그 시간이면 학교 쪽으로 출근하는 동네 사람들이 있거든요. 아마 부탁드리면 될 것 같아요.” “그렇게라도 할 수 있으면 꼭 나와라.”
대다수의 아이들은 그저 나와 그 아이의 잠시 동안의 대화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물론 그 순간 대다수의 아이들에게 원망을 눈빛을 보내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다만 그렇게라도 학교에 나와서 공부를 할 수밖에 없는 ○○이의 열악한 환경이 원망스러웠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공부하겠다는 ○○이의 마음이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