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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썩은 고구마, 나를 가르치다

부부가 함께 살면 식성도 따라가는 모양이다. 유난히 고구마를 좋아하는 남편 덕분에 내 식성이 변했기 때문이다. 생각만 나면 고구마를 쪄달라고 주문하다가 반응이 없으면 스스로 씻어서 쪄 먹곤 하는 남편이다.

나는 고구마에 대한 좋지 않은 추억때문에 고구마를 싫어하곤 했다. 초등학교 시절, 점심 시간이면 가난한 친구들은 밥 대신에 고구마를 먹던 시절. 어떤 친구는 거의 날마다 점심 도시락 대신 고구마를 먹었으며 그나마 없을 때는 수돗가로 달려가 물을 마시기도 했었다. 그 친구는 한 겨울에도 양말을 신고 온 적이 거의 없었고 헤진 바지에 길이마저 짧아진 옷을 입고 학교에 오곤 했다. 한 반 친구 50명 중에 제대로 점심을 가져오는 친구는 70% 정도 되었으리라. 나눠 먹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식사 시간이 되면 운동장에 나가 놀거나 어디로 가버려서 교실은 빈 자리가 많았었다.

내 기억 속의 고구마는 가난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우리 집도 넉넉한 편은 아니었지만 다른 집들처럼 자식들이 많지 않으니 점심을 고구마로 때울만큼 형편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 새 살림을 차린 새 어머니는 쌀을 아낀다며 호박밥이나 콩나물밥, 김치밥, 고구마밥을 즐겨 하셨다. 하얀 쌀밥은 명절에나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으니 요즈음 아이들이 들으면 정말이냐고 반문하리라.

어렸을 때 길들여진 입맛때문에 특정한 음식을 먹지 않거나 싫어하는 경우가 참 많다. 나에게는 호박이나 고구마가 좋아하지 않는 음식이 된 것은 바로 밥 속에 자주 등장한 탓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의 살림 지혜가 돋보인 선택이었으니, 쌀을 아낀다는 명분보다 건강에 참 좋다는 말씀을 하셨더라면 더 설득력이 있었을 것 같다.

시장에 나가 보면 고구마 값이 비싼 과일값을 능가함을 본다. 참살이 식품(웰빙식품)으로 건강 식품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고구마를 사기 위해 돈을 지불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내가 싫어하는 식품이니 혹시 친척집에서 선물로 받아도 즐겨 먹지 않으니 오로지 남편 몫이었다. 아내가 스스로 챙겨 주지 않으니 남편은 일요일 아침이면 양푼을 들고 고구마를 씻어서 쪄 먹는다며 아끼는 냄비를 태우곤 해서 타박을 듣곤 했다. 생각다 못해 지난 주말에는 할인매장에 가서 직화구이 냄비를 사들였다. 순전히 고구마를 구워 먹기 위해서, 아끼는 냄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오늘은 삼일절, 쉬는 날이니 남편은 어김없이 고구마를 들여다 보더니,
"여보, 썩은 고구마가 있네. 아까워서 어떡해!"
"알았어요. 날씨가 이렇게 따뜻하니 그런가 봐요. 내가 갈무리 해서 챙길 게요. 아니면 좋은 걸로 골라 사무실 식구들에게 나눠 주세요."
"내가 워낙 좋아하는 거라서 다 나눠 주려다가 조금 남겨 둔 것이 화근이었네. 에이 욕심이 탈이야."

내가 안 좋아하니 자주 들여다 보고 관심을 주지 않아 생긴 일이라서 고구마들에게, 저것들을 길러낸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더구나 다른 사람들에게, 고구마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은 일이었을 터인데 썩혔다며 내내 속상해 하는 남편에게도 미안하여 아침부터 부랴부랴 고구마를 씻어 불에 올렸다.

썩은 고구마들을 골라내보니 겉모습은 멀쩡한데 만지면 물렁물렁 했다. 아직 싹도 트지 않아서 얼른 봐서는 성한 것들과 똑같다. 게으른 주인때문에 제 할 일을 다 하지 못하고 버려지는 고구마들은 이제 흙으로 돌아가리라. 모든 고구마들이 싹을 틔우지는 않는 모양이다. 그대로 썩어버리는 것도 있는 걸 보니 생명의 신비감마저 느껴졌다. 어떤 것들은 땅에 심겨져 열 배 백 배의 수확을 올리는 가 하면, 어떤 고구마는 한 끼 식사로 없어지며 어떤 것들은 썩어서 흙으로 돌아가니, 사람의 삶과 같지 아니한가?

썩은 고구마는 땅으로 돌아가 흙을 비옥하게 할 테니 크게 보아서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고구마를 위로해 본다. 신이 창조한 세상의 사물들은 모두 이렇게 흙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길지 않은데, 인간이 만들어낸 물건들은 흙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너무 길거나 오염 물질들을 많이 뿜어내서 세상이 살기 어려워지고 질병이 창궐한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썩는 데 수 백년이 걸리는 플라스틱이나 비닐 종류는 인류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었지만 쉽게 썩지 않아 땅을 오염시키는 물질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니, 인간이 창조한 물질의 대부분은 썩지 않음을 기본으로 하니 쉽게 버릴 수 없는 것들이 아닌가? 유리로 만들어진 물건들, 일용품들도 대부분 플라스틱이거나 합성수지 제품들이니 쓰레기 봉투에 넣을 것들이 못 된다.

신의 창조물인 인간과 동물, 모든 식물들은 한결같이 썩음을 전제로 한다. 그것이 우주 질서의 기본이라고 생각하니, 신의 창조 원리를 넘어선 인간의 오만함으로 생긴 환경파괴의 재앙은 곧 인간의 몫인 것이다.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과학기술의 숙제는 이제 잘 썩는 물질이면서도 오염시키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가오는 세기의 문제점은 환경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썩은 고구마를 버리면서, 아니 땅으로 돌려보내면서 나도 한 개의 고구마로 살고 있으니 제대로 살고 있는 지, 겉모습은 멀쩡한데 속이 폭삭 썩고 있지는 않은 지 돌아보게 되었다. 아마 오늘 이후로 나는 결코 고구마를 푸대접하지는 않을 것 같다. 모든 것이 다 연결되어 있음을 보았으니 뒤늦은 깨달음 한 조각에 감사할 뿐이다. 이제 다시는 고구마를 보며 가난을 연상하지도, 쌀밥을 그리워 했던 유년도 떠올리지 않으리라. 오늘 먹은 고구마 맛은 예전의 그것이 아니었다. 말없이 땅으로 돌아가는 썩은 고구마가 3월 첫날 나를 가르치는 스승이 되었구나! 홀리스틱교육은 바로 이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 나와 연결되어 있으며 순환된다는 것을! 
 
2007학년도에 만나는 아이들에게는 하찮은 사물 속에서도 숨겨진 의미를 찾게 하는 '마음의 눈'을 어떻게 띄워줄까 고민하며 살라는 3월 첫날에 깨달은 화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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