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아침. 막내 녀석의 부산에 아내와 나는 잠이 깼다. 방문을 열자 막내 녀석은 거실에서 태극기를 꺼내들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하고 있었다. 누군가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나를 보자 막내는 반가움에 도움을 요청했다.
“아빠, 태극기 달아도 돼요?” “그게 무슨 말이니?”
“여기는 우리나라가 아니잖아요?” “녀석, 그러는 법이 어디 있니? 상관없으니 가서 태극기를 잘 게양하렴.”
녀석은 내 말에 안심이 되었는지 태극기를 들고 쏜살같이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 보니 이곳 필리핀 바기오에 도착한 지 2개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시내 어느 곳에서도 우리나라 태극기를 본 적이 없는 듯했다. 그러다 보니 막내 녀석은 외국인들이 자국의 국기를 게양하면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고국을 떠나 오랫동안 외국생활을 하다보면 자칫 고국의 국경일을 잊을 수 있다. 그래서 이곳에 오기 전에 제일 먼저 챙긴 것이 국경일이 표시된 고국의 달력과 태극기였다. 최소한 아이들에게 만큼은 고국의 국경일을 상기시켜 주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발상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집 곳곳에는 이곳 필리핀에서 제작한 현지 달력이 아닌 한국 달력이 걸러있다.
막내 녀석이 태극기를 바르게 달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아내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막내 녀석은 생각보다 태극기를 잘 게양해 두었다. 막내 녀석은 대문 앞을 지나가는 현지인의 시선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이국땅에서 펄럭이는 우리나라 태극기를 한동안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 거주하고 있는 이곳은 한국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고 있는 지역으로 ‘바기오’시에서도 한참이나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일까? 우리 집 대문에 내걸린 태극기를 보며 오늘이 무슨 날인지를 물어보는 일부 현지인들도 있었다. 하물며 우리나라 태극기를 처음 보는 현지인은 사진을 찍기도 하였다.
요즘 역사 왜곡으로 인해 우리나라 국사 교육의 정체성이 흔들릴 위기에 있는 만큼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 국경일의 진정한 의미를 바르게 아는 것이라고 본다. 국경일이 마냥 노는 날로 인식되어 국경일의 진정한 의미가 퇴색되어 간다면 더 큰 화를 불러일으킬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오후에는 이곳으로 조기 유학을 온 한국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오늘이 무슨 날인지를 모르고 있었으며 설령 안다고 할지라도 3·1절의 의미를 알고 있는 아이들은 거의 없었다. 앞으로 이 아이들이 좀더 오랜 시간을 타국에서 생활을 한다고 가정할 때 그들에게 있어 고국의 국경일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궁금해진다.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들에게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줄 필요가 있다. 이곳에서 느낀 바이지만 가끔 길을 걷다가 한국에서 만든 자동차를 우연히 마주할 때 한국인으로서 자긍심을 느끼게 된다. 하물며 이곳의 청소년들이 제일 갖고 싶어 하는 것이 한국에서 만든 휴대폰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왠지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간 적도 있었다.
타국에서 휘날리는 태극기는 우리나라의 위상을 세계에 펼쳐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문 앞에 내걸린 태극기를 바라보며 막내 녀석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마도 녀석은 한국인으로서 자긍심을 다시 느끼고 있음에 분명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