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학년도 대학입시부터 대학별 고사의 비중이 확대됨으로써 논술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대학입시에서 논술시험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은 1994년으로 당시에는 단순 작문 형태였으나 차츰 내용의 깊이를 더해가면서 오늘날의 통합논술에 이르고 있다. 일각에서는 논술시험이 서구에서 들어온 합리주의 교육관의 일부분으로 이해하고 있으나 그것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인재 선발 방식이었던 과거제도를 간과한데서 온 단견의 소치다.
그렇다면 조선의 관리임용 제도인 과거제도는 오늘날의 논술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대개 과거시험하면 고루한 성리학 서적을 외워서 쓰는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과거제도는 당시의 사회적 상황에 대한 분석력과 논리적으로 서술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문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창의적 능력을 갖춘 우수한 인재를 선별하기 위한 검증 장치였다. 이 점은 오늘날의 대학입시에서 논술 시험이 추구하는 목표와 별반 다르지 않다.
논술시험은 출제자의 의도가 담긴 논제(제시문 포함)와 응시자의 견해가 담긴 답지로 구분할 수 있다. 과거시험도 논제에 해당하는 책문(策問)과 답지에 해당하는 대책문(對策問)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원급제한 답안의 수준은 상당히 높은 편으로 오늘날의 학생들이 이해하기에는 다소 버거울 수도 있다. 이는 주로 책문에 대한 이해와 분석 그리고 대안제시가 오늘날의 학문과는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나, 그러나 일정 수준의 한문 실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대강의 뜻은 이해할 수 있다.
중종 20년(1525)에 ‘삼년상(三年喪)’이란 과제로 치러진 과거시험(『동책정수』 상권 1편 참조) 을 살펴보면, 책문은 「부모가 돌아가시면 3년 상을 치러야 함이 당연하나 갖가지 구실을 들어 상례(喪禮)의 기강이 문란해졌음을 들어 이에 대한 시비(是非)를 논하라」는 내용이었다. 성리학을 국시(國是)로 삼은 조선사회에서 충효는 가장 핵심적인 가치로 특히 효의 상징인 상례의 문란과 관련하여 유생들의 견해를 물어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인간의 근본과 관련된 ‘삶의 태도’, ‘삶의 가치’, ‘개인과 사회’등을 묻는 오늘날의 논술 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위의 책문에 대하여 가장 뛰어난 대책문(답지)을 작성하여 장원급제의 영광을 차지한 유생은 박광우(朴光佑; 1495-1545)였다. 그가 작성한 대책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서두에 상례의 본질이 왜곡된 문제 상황을 제시하고 본문에서 중국 역대 왕조와 공자, 증자 등 성인들의 사례를 들어 효의 본질적 가치와 제도적인 차원의 변화 과정을 분석한 후, 맺음말에서 모든 행실과 제도의 근원이 효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일정한 절차에 따라 논리적으로 서술한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논술시험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과거제도는 단순히 성리학적 지식의 수준을 평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 가치와 사회적 현안에 대한 심층적인 지식과 창의적 사고 그리고 합리적 대안을 측정하기 위한 시험이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 500여년의 역사 동안 인재 선발 방식은 오로지 과거제도였고 오늘날처럼 단순 지식을 묻는 객관식(선다형 등) 시험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 면에서 객관식 시험은 전통적인 우리의 시험 방식이 아니다. 서구 사회에서 가장 오래된 논술시험으로 불리는 프랑스의 바칼로레아도 과거제도에서부터 시작된 우리의 논술시험과 비교하면 그 역사는 오히려 일천할 따름이다. 그런 면에서 논술시험이야말로 과거제도와 맥을 같이하는 유서깊은 우리의 전통적인 시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