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한의 소설 “모래톱 이야기”를 읽어 가다 보면 부패정권에 대한 과감한 저항은 주인공 건우 할아버지 조상의 선비정신을 통해 나타난다. 선비 정신을 지켜온 건우 할아버지의 바른 정신은 결국 모래톱 마을을 송두리째 독식하려는 부패 관리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진다. 폭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고 한, 김수영의 시 “폭포”에서도 바른 정신의 길은 부패 정권에 대한 비판의식으로 펼쳐진다. 부패 의식을 청산하고 혁신하는 길이 되기 위해서는 올바른 교육이 선행되어야 하고, 그 바탕에는 주체성 있는 선비정신이 흘러야 한다. 바른 시민 의식은 교육이 바로 서는 데서 사회의식이 나타나고, 바른 행정 또한 바른 행정 모니터 요원들에 의해서 통제되고 교정되어 가야 한다.
우리 시대의 선비는 교사 정신이다
교육이 과도기를 달려가고 있는 이 때 청산과 혁신은 이 시대의 영웅으로 돋보이는 단어들이다. 썩은 것을 과감하게 도려내지 않고서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데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혁신을 부르짖으면서 겉으로는 온갖 만행을 저지르는 두 얼굴을 가진 사람들도 시대정신을 걸러가고 싶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면서까지 새로운 길을 받아들이려고 하지는 않는 것이다. 선비의 혼령이 학교 곳곳에 안주하는 한 현대판 비리와 현대판 껍데기 교육의 허실을 바로잡는 데는 그리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파렴치한 교사라면 선비정신을 소유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선비정신은 바른 소리를 통해 곧은 정신을 학생들에게 전수시키는 데 있다. 아무리 톡톡 튀는 학생들이라고는 하지만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 정신은 바로 자신의 길을 바로 걸어 가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소유한 자에게서 나타난다. 선비정신을 소유한 교사가 할 수 있는 길은 바른 인성 교육의 터전을 잡아주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교사정신은 곧 선비정신이라고 주저없이 말할 수 있는 것도 교사의 바른 정신이 곧 바른 학생을 만들어 주는 첩경이기 때문이다.
사육신만 이 나라의 선비의 대명사가 아니다. 그들은 이미 죽음을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정신을 심어준 역할을 했다. 교사만이 이 시대에 선비정신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부르짖고 싶어서 선비 정신을 되짚는 것은 아니다. 독립투사로 알려진 안중근 의사도, 시인으로 살다 간 조지훈도, 일제시대를 뼈아프게 살다간 윤동주, 이육사도, 그들은 이 시대의 사육신의 피의 정신을 이어 받은 소유자들이다. 거리를 거닐다 보면 길거리 주변에 솟아난 잡초들을 보면서 풀의 끈질긴 생명력에 감탄을 자아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 잡초에 끈끈한 선비의 끈질긴 집착력을 연상해 보는 것은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풀의 무질서한 모습을 보면서도 그 풀의 질서를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잡초들의 세상에는 잡초들만이 살아가는 질서가 있다. 잡초라고 하여 아무 곳에서나 자신의 뿌리를 내리는 것은 아니다. 잡초의 질서는 풀의 서열을 만들면서 살아간다. 한 곳에 잡초가 많이 솟아나기에 다른 곳 잡초는 죽어야 한다는 법칙도 없다. 그들은 서로 풀뿌리로 맺어 거대한 초원의 싱그러움을 창조해 내어 인간에게 마음의 풍요를 선사하기도 한다.
아침에 따끈한 한 잔의 커피를 마시는 여유의 정감이
아침에 따끈한 한 잔의 커피를 마시는 여유의 정감을 가지고 먼 산을 쳐다보면, 작열했던 여름의 열기도 서서히 가을의 석양으로 기울어져 가는 것처럼, 들뜬 교실의 분위기도 아침에 출근하여 마시는 커피 향기같이 스며나올 수 있었으면. 강한 이미지를 풍겨 주는 선비정신이라는 말보다는 따끈한 한 잔의 커피의 노래를 부르면서 마음의 교환이 이루어지는 그런 교실을. 학업에 관심이 없는 이들에게 새로운 흥미를 만들어 줄 수 있는 길. 없음에 고뇌의 정수리가 요동치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