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시아버님 기제사가 있어 큰 집이 있는 인천에 다녀왔다. 타지역에 거주하는 아들에게도 연락을 하여 제사에 참여하라고 하였다.
음식 장만에 힘이 드셨을 형님을 위해 남편은 좋은 포도주 한 병을 선물로 들고 갔다. 한 두 잔씩 마시면 건강에 좋다는 말을 들은 까닭이다.
살아생전에 늘 뵙던 모습을 대한다는 마음으로 안부를 묻고, 지난 1년 동안 집안에서 일어났던 이러저러한 일들을 전해드리고 기쁨과 걱정, 바램을 함께 해달라는 말씀을 올리고 정성으로 마련한 음식을 대접하려 하였으므로 의례의 절차나 음식차림에 큰 부담을 갖지는 않았다.
제사를 끝내고 아버님의 복이 깃든 음식을 나누면서 필자는 아들에게 당부하였다. “엄마, 아빠의 제사는 이렇게 해주면 좋겠어.”
상에 지방을 쓰기보다는 엄마, 아빠의 다정하고 이쁜 모습이 들어있는 사진을 올려놓아라. 젊고 발랄했던 시절의 사진을 보며 손자, 손녀, 증손, 고손들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멋진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더러는 사진 속의 옛 사람들의 의상이나 취미에 관심을 가질 지도 모르겠다.
음식은 엄마, 아빠가 생전에 좋아하던 것을 놓기를 바란다. 혹시 너희들이 세계 곳곳 더 나아가 증손이나 고손에 이르면 화성 어디에서 살게 될지 모르니 그 때에는 저승에 사는 우리도 그 곳의 새로운 먹거리를 접하는 호사를 누리고 싶으니 그 곳에서 너희들이 가장 즐겨 먹는 것을 놓기를 바란다. 몇 백 광년이 걸리는 곳에 서로 흩어져 살지 모르므로 혹시 화상으로 연결할 수 있으면 화성에서 달에서 지구에서 화상으로 연결하여 기일에 서로의 소식을 주고받을 수도 있겠다. 그 때쯤이면 화상연결이 아니라 사람이 전송되어 만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증손이나 고손은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증조부, 증조모, 고조부, 고조모의 제사를 하루 날짜를 잡아 함께 올려주면 오랜만에 저승 곳곳에 흩어져 살던 저승 식구들이 덕택에 한 번 더 함께 모일 수 있으니 좋겠다.
굳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오기는 이승이나 저승이나 매 한가지 일 것이다. 그러니 좋은 얼굴로 서로를 환영하며 반가워하고, 서로를 위해주기를 바란다. 먼 조상, 가까운 조상과 먼 후손, 가까운 후손이 함께 마주하며 기쁨과 슬픔, 희망과 기대를 나누며 의논하고 힘을 보태면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다.
큰 아들 따로, 큰 며느리 따로, 어른 따로 아이들 따로 인사할 필요없다. 설날 어른들께 세배하듯이 큰 집부터 집집이 어린 아이들이 앞에 서고, 엄마, 아빠가 뒤에 서거나, 엄마 아빠가 앞에 서고 큰 아이들이 뒤에 서 인사를 해주면 한집안 식구들을 한 눈에 볼 수 있어 좋겠다. 태어난 지 얼마안된 아기녀석은 강보에 쌓은 채로 앞에 놓아주면 정말이지 너무도 예쁠 것이다. 그리고 집집의 일을 대표자인 아버지가 간단히 말해주고 각자가 각자의 말로 시간 안배를 하여 한 두마디씩 해주면 얼굴을 한 번 더 쳐다보고 그 속을 알겠다. 얼굴을 떠올리며 같이 기뻐하거나 같이 근심하며 해결책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저승 어른들의 식사시간에 뒤로 돌아있거나 밖으로 나갈 필요없다. 각자의 위치에서 일정시간 동안 소리를 낮추고 예의를 차리며 각자의 일들을 하면 조상들도 식사를 하면서 당신들의 일상사를 서로 건넴과 동시에 변한 시대의 일상사를 조금은 알 수 있으며, 시공간을 초월한 조상과 후손이 서로를 이해하는 폭이 넓어질 것이다.
시아버님의 제사를 마치고 필자는 번쩍번쩍 번개가 섬뜻하고 쾅쾅 천둥이 치며 함지박으로 물을 퍼붓듯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길을 나서며 집으로 가는 길에 필자의 친정어머니의 산소를 찾아뵙기를 원했다. 남편은 날씨가 걱정스럽기는 하였지만 마나님의 소원도 들어주고 장모님도 뵙겠다고 네비게이션에 친정어머님의 산소가 있는 곳을 맞추었다.
날씨가 너무 험하여 산에 오를 수 있나 걱정을 하였으나 경기도에 이르러 비가 잦아들더니 산 즈음에서 해가 나기 시작하였다. 무심한 딸이지만 반가운 마음에 날씨의 신께 부탁을 하신 모양이다. 바로 옆에 계신 할아버님과 할머님을 먼저 찾아뵈었다. 필자에게 좋은 일이 있거나 혹은 나쁜 일이 있으면 더러 꿈에 나타나셔서 기쁨을 나누고 근심어린 모습으로 걱정을 덜어주시는 분들이다.
어머님의 묘소에는 평소에 좋아하시던 식혜를 뿌려드렸다. “엄마, 잘 지냈어? 지낼만 해? 요새 집에 이러저러한 일이 많았어. 좀 더 오래 살았으면 얼마나 좋아. 이제 아이들도 크고, 생활에 여유도 생기니 엄마 생각이 더 많이 나. 요즈음 같으면 함께 여행도 자주하고, 전화도 자주할 수 있는데 ...... 좋은 곳에 환생해서 잘 사세요.”
친정어머니는 세상의 그 어떤 존재와도 다르다. 편한 마음으로 말을 건네고 과일과 식혜를 먹으며 앉아있다가 햇볕이 너무 강해 일어나서 집으로 향했다. 두달 전에 남동생들이 벌초를 하였음에도 비가 많았던 탓인지 풀들이 꽤 자라있었다. 바쁜 중에도 틈틈이 어머니를 돌보는 동생들이 대견하나 세상이 더 번다해지면 매장의 풍습은 사라질 것이다.
제사를 지내며 가장 크게 느끼는 것은 자식의 귀함이다. 이 세상에 필자가 존재했음을 알리는 가장 강력한 증거이며, 이승을 떠났더라도 그 숨결을 잇는 살아 숨쉬는 보물들인 것이다.
몬테스키외는 한 민족의 번성에 아주 작고 사소한 생각이 원인이 될 수 있는데 중국의 경우 자식이 아버지를 신처럼 모시는 효사상을 들고 있다. 자식은 부모가 살아계실 때에도 공경하고, 돌아가신 다음에도 신처럼 떠받들므로 사람들은 누구나 자식을 얻기를 소망하고 가족 수를 늘리기에 열심한단다.
이러한 효사상에 연연하기는 중국보다는 한국이 더 하다. 필자는 서로를 위하는 즉 부모는 자식을 공경하고 자식은 부모를 공경하는 상호공경사상이 일방적인 효사상보다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른들만을 위한 일방적인 효사상은 폐해가 심할 뿐 아니라 지금껏 지속되어 내려온 유대를 훼손시킬 수도 있는 위험에 처해 있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상호간의 소통이지 의례의 틀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어찌되었거나 자손이 부모를 모시고 부모가 자손을 귀히 여기는 사상은 우리 민족이 5000여년을 이어오는데 큰 자산이었을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2000년을 흩어져 살면서도 한 민족을 유지하고, 몰살을 당하는 참혹함 속에서 끊임없이 재기하는 이유가 자신들은 선택된 백성이며 그 땅에서 강력한 통치자가 나타나리라는 믿음이었음과 마찬가지로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여 조상과 후손간의 연결을 강력하게 구현하였던 사상과 그를 수행하는 제사 의식의 뿌리내림이 한민족의 번영과 지속에 기여하였을 것이다.
생물의 유전자를 이용하는 생명공학 발전의 속도를 보면 멀지 않은 미래에는 조상과 후손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정립될지 혹은 있기나 할지 모르겠다. 시험관에서 인간을 대량생산하게 될지라도 특정 유전자를 중심으로 한 조상과 후손이 이어질 수 있으려나?
이승에서 뵐 수는 없을 망정 해마다 가족들이 함께 기억하고 이야기를 전하는 자리에서 조상님의 따듯한 품이 후손을 돌보리라는 믿음과 은혜에 감사하며 특히 친정어머님을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