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의 꿈과 희망을 대변하고 관철해 온 한국교총이 23일 창립 55돌을 맞았다. 교총 55년 역사는 교권 확립과 교육입국을 위한 다양한 활동들로 점철돼 있다. 선생님들과 함께 걸어 온 교총 55년의 발자취를 문답식으로 정리해 본다.
#문-교총은 언제 어떤 계기로 태동했나.
답-해방이후 교육계는 교육발전의 주도세력으로 교원단체의 설립을 소망했다. 1947년 11월 23일 100여 명의 교육자가 모여 '조선교육연합회'를 발족, 이듬해 대한교육연합회로 개칭했다. 6·25전쟁 중인 52년 전국현장교육연구대회를 창시했고 52년 8월 창립된 세계교직단체총연합(WCOTP, 현 EI-education international의 전신)의 발기단체로 참여했다. 53년 피폐된 교육의 재건을 위해 교육주간 행사와 교육공로자 표창제도를 도입했으며 58년 '교원윤리강령', 59년에는 '교련강령'을 채택해 전문직 단체로서의 윤리와 조직활동의 목표를 정비했다.
#문-전문직 통합단체로서의 교총은 60년대 교원노조 파동으로 한차례 체질 개선을 한 것으로 안다. 그리고 당시 벌인 대표적인 활동을 든다면.
답-60년대 태동한 교원노조, 60년대 중반 불거진 학교급별 간의 불화와 갈등은 교총의 분열 위기로 이어졌으나 교총은 대의원, 임직원에 평교사의 참여 폭을 넓혀 학교급별 갈등 조정과 조직강화를 기해 나갔다.
5·16 군사쿠데타 하루전인 1961년 5월 15일 새한신문(현 한국교육신문)을 창간하고 66년에는 제15차 WCOTP 총회를 유치,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 군사정권 초기에는 교원정년 원상 회복과 교육자치제 복원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68년에는 '600만 어린이를 입시지옥에서 구출하자'는 슬로건으로 캠페인과 정책건의 활동을 벌여 중학교 무시험제를 실현시켰다.
#문-유신정권에 이은 제5공화국 시절 교원단체 활동은.
답-1972∼1987년을 교원단체 시련기로 부른다. 72년 유신체제 출범, 79년 10.26사건과 12.12사건으로 태동한 군사정권이 '교직단체정비지침' 등의 수용을 강제함으로써 타율과 외압에 의해 조직 활동이 위축되고 시련을 겪었으나 교총은 나름대로 조직의 자율성을 지켜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했다. 81년 교원보수 우대 등을 법제화해 준 국회의원 6명에게 감사 표시로 준 저가의 돗자리 선물이 한 국회의원의 과장 왜곡 폭로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지만 대검 특수부 수사결과 무혐의 처리됐다.
또 86년 4·13 호헌지지 성명을 요구하는 권력의 외압에도 불구하고 교총은 이를 이행하지 않았다. 교총이 호헌지지 성명을 냈다는 일부 주장은 사실과 전혀 다른 왜곡된 것이다. 이런 가운데서도 교총은 73년 사립학교교원연금법 제정 실현, 74년에서 76년까지 '교원제자리찾기운동'을 통한 교직사회의 위상 제고, 81년 교육세법 제정, 82년 완전한 초중등 단일호봉제 실현 등의 성과를 이루어냈다.
#문-88년 이후 사회 각계 민주화와 함께 교총은 또 한차례 환골탈태의 전기를 맞게되는데.
답-전문직 단체에서 전문직 이익단체로 거듭나게 된다. 교원 권익 신장을 위한 활동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됐다는 의미다. 89년 단체 명칭을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로 변경했고, 90년 전국 각급학교 분회장과 교육계 대표들이 참여하는 전국교육자대회를 개최하고 한국교육신문을 30만부
발행함으로써 조직의 활성화와 대외 역량 강화의 전기를 마련했다.
91년 5월 교원지위향상을 위한 특별법 제정으로 교육부와의 교섭권을 갖게됐고 94년 교총 부설연수원 개원, 정부 예산에서 누락된 담임수당을 국회활동을 통해 신설, 96∼98년 교육재정 GNP 5% 확보, 98년 '교육공황 부른 이해찬 교육부장관 퇴진 서명운동' 전개, 체력단련비 부활, 2000년 교원예우규정의 대통령령 격상, 제5회 동아시아교육회의 개최, 소규모학교 교감직 배치, 2001년 임용전 군경력 100% 인정, 지방교육재정교부율 인상,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규탄대회 및 1천만 서명운동 전개, 올해는 교원 정치활동 강화와 함께 원격연수원 체제 출범 등을 통해 전문직 이익단체로서 성장 발전해가고 있다.
#문-교총 조직 구성은.
답-지역조직으로 16개 시·도교총, 176개 시·군·구교총, 1만 738개 학교분회가 있고, 직능조직 5개, 전공별단체 16개, 학교급별 직위별, 남녀별, 설립별 단체 10개로 구성돼 있다. 회원 수는 1947년 창립 당시 1만 명이었으나 1957년 6만 명, 1967년 12만 명, 1977년 18만 명, 1987년 25만 명에 이어 1998년에는 26만 명으로 최고 수준을 기록했으나 정년단축과 교원노조 신설, 단체 활동 기피 교원 증가 등 여파로 현재 20만 명 선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올해도 4700여 명의 교원이 신규 회원으로 가입하는 등 교총에 대한 교원들의 기대와 참여 열기는 높다.
#문-교총 회장은 어떻게 선출하나.
답-2000년 제29대 김학준 회장부터 전국 1만1천여 학교 분회장, 대의원, 시·군·구교총 회장을 선거인단으로 한 전국교육자대회에서 선출했다. 그 이전에는 대의원회에서 선출했다. 2005년 선거부터는 대표성을 한층 강화하기 위해 전 회원 직선제안이 검토되고 있다.
#문-역대 교총 회장 중 최장수 회장은.
답-교총 사상 3대에 걸쳐 연임한 회장은 7∼9대 유진오, 10∼12대 임영신, 13∼15대 박동묘 회장이고, 2대 연임 회장은 최규남, 정범석, 윤형섭, 이영덕 회장과 이군현 현 회장이다. 3대 연임 회장들의 경우 1960년 9월부터 1976년 3월까지 차례로 바톤을 이어받았는데 당시는 회장 임기가 2년이고 중도에 사퇴하기도 해 재임 기간은 각각 다르다. 임 영신 회장이 1965년부터 1971년 12월까지 6년 1개월간 역임해 재임 기간이 가장 길다. 유진오 회장은 5년 1개월, 박동묘 회장은 4년 2개월 재임했다.
#문-이젠 초·중등 평교사 출신이 회장을 맡을 때가 됐다는 소리도 있는데.
답-교총은 전문직 통합단체이다. 교원노조와 같이 원천적으로 대학교수와 초·중등 관리직의 회원 자격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몰라도 학교급별 직위별로 회장 입후보를 제한할 수 없고 제한해서도 안된다. 교총의 이상과 목표가 교원들의 단합된 의지로 교권을 확립하고 교육입국을 이룩하자는 것이므로 대학교수와 관리직을 배제할 이유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현행 선거제도에서 평교사 출신이 반드시 불리한 것도 아니다. 이미 시·도교총 단위에서는 평교사와 관리직이 번갈아 회장에 당선되는 현상이 나오고 있다. 어느 학교급 어느 직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전 회원의 지지를 받는 대표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문-교총은 교원들의 권익을 신장하기 위한 활동을 어떻게 벌여왔나.
답-91년 말 교원지위향상을위한특별법이 제정되고 92년부터 대 정부 교섭을 시작하기 전에는 대 정부·국회를 상대로 한 건의·로비 활동이 거의 전부였다. 90년 이후에는 대규모 집회와 서명 운동 등 보다 적극적인 방식을 통해 교원들의 의사를 알리고 관철시켜 나가는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92년부터는 대선과 총선이 있는 해에 대통령 후보와 각 정당 대표를 전국교육자대회와 토론회에 초청해 교원들의 요구사항을 공약에 반영토록 하는 활동도 벌이고 있다. 최근에는 교원 및 교원단체의 정치적 기본권 신장을 강도 높게 요구하고 있다.
#문-교원들의 여망을 수렴해 교육정책을 선도하려면 목소리만 커서 될 일이 아니고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정책대안을 개발하고 요구해야 한다고 보는데.
답-교총은 1964년 '중학입시 개선 방안' 보고서 제1집을 시작으로 올 9월 '10년 단체교섭 분석 연구'에 이르기까지 112집의 연구보고서를 발간했다. 그리고 정책자료집으로 1966년 '의무교육 통계자료'를 펴낸 이후 올 7월 '실업계 고교 활성화 방안'까지 71집을 펴냈다. 교총이 발간하는 연구보고서와 정책자료집은 모두 그때그때 교육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교육전문가와 현장교원들이 팀을 이뤄 공동 작업한 결과물이다.
교총은 교육 현안에 대한 해결 대안을 제시하는 방식의 하나로 교육정책토론회도 수시로 개최한다. 1989년 '입시위주의 교육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를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한 이래 12월 대선을 앞두고 지난달과 이 달 이회창, 노무현, 정몽준 후보 토론회를 개최하는 등 41회의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처럼 심도 있는 정책 연구를 통해 이루어지는 교총의 대안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국가사회 발전을 염두에 두고 작성돼 정책화 가능성이 큰 특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