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여러분! 이번에 000활동에 참가하시는 000대원 여러분은 지금 시청각실로 오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을 드립니다. 이번 000활동에 참가하시는 학생 여러분은 지금 시청각실로 오시기 바랍니다.”
지나친 존칭어에 신경이 거슬린다. 아무렇지도 않게 이러한 내용을 방송을 통해 들을 때마다 듣기가 거북하다. 학교방송에서 가끔 선생님들이 방송을 할 때, 학생들한테 극존칭을 사용함으로써 듣는 사람을 묘한 느낌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학생을 사랑하고 존중해 주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데 너무 지나치게 위해주다 보니 누가 어른이고 누가 어린이인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다.
우리나라는 동방예의지국으로 옛날부터 예의가 바른 나라라고 한다. 때와 장소에 따라 알맞은 인사말과 격에 맞는 존댓말을 사용해 왔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존댓말, 예삿말, 낮춤말로 일상생활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자기보다 나이가 연배이면 존댓말을, 자기와 같은 또래의 나이이면 예삿말을 손아래 사람이면 낮춤말을 사용하였던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사회가 다변화 하면서 상대방을 존중하여 아름다운 말을 사용하고, 마음을 순화하기 위해 바른말 고운 말을 사용하여 상대방을 존중해 주기 위해 사용하는 존댓말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본 리포터도 동감을 한다.
그러나 선생님이 학생에게 아주 높임말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문제가 있다고 본다. 대체적으로 학교 현장에서 학생들에게 예사 존댓말을 사용하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다. 또 어려서부터 엄마가 아이에게 부드러운 말투로 아이를 존중하는 표현을 담아 이야기하면 말을 배워가는 아이도 남을 존중하는 말투를 하게 된다. 아이에게 존댓말을 가르칠 목적으로 심부름을 시킬 때 “00 주세요.”처럼 존댓말을 사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교육현장에서 아이들에게 바르고 고운 존댓말을 사용함으로써 아이들 세계에서 분위기도 밝고 명랑해지며, 귀여운 아이들을 존중하고 사랑으로 이끌어 줌으로써 교육적으로 인성교육에 바람직한 일이라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 이는 어디까지나 상호간에 격에 맞는 말을 바르게 사용하였을 때 이야기이다.
그런데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너무나 지나친 존칭을 사용하여 듣기에 거북할 정도로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정작 아이들은 선생님께 함부로 말하는 경우를 흔히 본다. 물론 몰라서 사용을 하는 경우에는 어찌할 수가 없지만 알면서도 군중심리로,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아서 등 별다른 의미 없이 말을 내뱉고 마는 것이다. 우리가 언어를 사용을 할 때에는 바르게 알고 사용을 하여야 한다.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사용을 하면 어색하고 서로가 불편한 관계가 있는 것을 일상생활에서 흔히 보게 된다.
존칭어 사용이 격에 맞지 않는 아주 높임말로 사용이 되면서 주객이 전도되어 아이들이 아주 상전이 되어버린 듯 하다. 상대에 따른 바른 말과 그에 맞는 행동을 하여야 함에도 오히려 선생님을 우습게 생각하고 함부로 행동을 하며, 수업시간에도 멋대로 언행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어서 교육을 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심지어는 학습활동에 동참하지 않아 주의를 주면, 선생님 앞에서 “아이~ 씨!, 씨~*” 등 예삿말처럼 내뱉는 아이들을 볼 수 있다. 순간적으로 선생님한테 주의를 받자 자기감정을 억누르지 못하여 친구들한테 하던 식으로 내뱉는 것이다. 화가 나서 “야! 이 놈아 누구한테 씨*이냐?”고 하면 학생들은 “야! 이 놈아”하면서 선생님이 욕을 하였다며 군중심리를 자극하기 위해 큰 소리로 따라하는 아이들을 볼 수 있다. 참 어이가 없는 일이다.
이제 초등학교 5, 6학년인데, 저희들이 선생님 앞에서 “아이~씨!, 씨~*”하는 것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하고 선생님이 화가 나서 하는 욕설은 큰소리로 따라서 하는 이 현실에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부 아이들은 버릇이 되어 선생님한테 함부로 대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특히 교담교사나 기간제 교사 및 시간강사에게는 특히 심하다. 담임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대해도 괜찮다는 인식이 되어 함부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간제 교사나 교담교사들이 아이들하고 싸우기 싫고, 또 이일로 인해 학부형과의 심각한 문제가 야기 될까봐 그냥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마음속으로만 울화를 삭이고 마는 경우가 많다. 하기는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마음이 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분명히 교육에 대한 방관이자 복지부동이다. 학생이 잘못을 해도 신경 쓰기 싫으니까, 공연히 긁어 부스럼 될까봐, 담임도 아닌데 화가 나서 체벌을 가하였다가 나중에 체벌교사로 문제가 될까봐, 그냥 모른 체 덮어두자는 것 밖에 안 된다. 그러다보니 아이들은 더 장난을 치고 엉뚱한 짓을 하며 자꾸만 학습 분위기가 좋지 않은 방향으로 확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수업 중에 장난을 치고 엉뚱한 짓을 하는 아이들이 많이 있지만 통제가 되지 않아 수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통제가 되지 않는 학급에서 아무리 수업을 열심히 한다고 한들 제대로 학습이 이루어질 리가 없다.
몇 년 전만 하여도 학교현장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다. 학생지도를 위해서는 담임뿐만 아니라 학교의 모든 분들이 모두가 내 자식을 키우듯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보는 대로 지도를 하였다. 교장선생님도, 교감선생님도, 학교에 어느 선생님이 되었더라도 학생의 비행을 보면 모두가 생활지도 선생님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 가 옆 반에 아이들이 엉뚱한 짓을 하여도 관심이 별로 없다. 하긴 우리 반 아이들 챙기기도 바쁜 사항이니 어찌할 수가 없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학생들이 함부로 언행을 하여도 교사의 권위가 서지 않기 때문에 생활지도를 바르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교실현장에서 권위가 서지 않는 교사의 지도는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거기에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체벌은 일체하면 안 된다는 학교 생활규정으로 교실 현장은 더욱 난감한 상태이다.
초등학교 교육은 국민생활에 필요한 기초기본교육이다.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기본적인 언어에서부터 하나씩 개선해 나갈 때 교육의 정상화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아주 높임말을 사용하고 아이들은 함부로 말을 하는 현실, 아이들이 상전인 상태에서는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가 없다. 전국적으로 만연되고 있는 생활지도의 어려움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언제까지나 수수방관만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공교육의 정상화는 엄청나게 교육에 재정적 투자를 하여야만 하고, 특별한 교육정책을 추진하여야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로 교실현장에서 교사의 권위를 세워주고 교육공동체가 서로 믿고 따를 때 교육의 정상화가 이루어진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