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굉장했어. 내가 무너져? 아직 멀었어”
주용욱 부산 전포초등교 교사. 그는 30년을 한결같이 연극판을 지켜온 '배우'다. 그러나 연극을 자신의 이름 내세우는 수단으로 삼은 적 없고, 화려한 조명 아래 한 번도 어깨에 힘주며 뻐겨본 적 없다. 연극배우, 주용욱. 그가 아서 밀러작 ‘세일즈맨의 죽음’의 윌리가 되어 무대(4~7일·부산교대 소극장)에 섰다. 그리고 이 시대 중년들에게 외친다. “아직 멀었어, 죽어도 못 죽어”라고.
회색 중절모, 회색 양복을 입고 회색 도시를 걸어가는 중년의 남자.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 한 줄 실오라기라도 잡아보려는 몸짓. 그러나 여의치 않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다….
연극배우 주용욱(56). 그가 중년의 세일즈맨 윌리를 만난 것은 15, 6년 전이었다. 대학시절(1971년) 우연찮게 부산교대 교사극단 한새벌에 발을 디딘 이후로 연극의 길을 걸어온 그에게 재부 극단의 '세일즈맨의 죽음'은 인상깊은 작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1940년대 미국사회를 살아가는 중년남자의 비애. '늙고 무능하다'는 죄목으로 회사에서 쫓겨나고 자식들에게마저 홀대받는 아버지 윌리. 그때는 윌리의 고뇌가 깊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시절, '퇴출'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너무나 낯설었으므로….
2002년 12월. 나이 오십 중턱을 넘어 그는 다시 윌리를 만났다. 30년 연극 인생을 축하하기 위해 동료와 후배들이 선택한 작품이다. 그간 맡아온 어떤 배역보다 자연스럽고 가슴 뭉클하게 와 닿는 것은 '나이' 탓일까.
"사람이 성공하려면 인기가 있어야 해. 나? 굉장했지. 아버질 모르는 사람이 없었거든. 내가 무너져? 아직 멀었다"
철부지 자식들에게 짐짓 허풍을 떨어보지만 현실은 가혹하다. 36년 간 피땀 흘리며 몸바친 회사가 그에게 보낸 손짓은 해고통보. 세일즈맨은 지나가는 차에 스스로 몸을 던진다. 밖에서는 밖대로 고통받고 집에서는 장성한 아들들 멱살을 잡으며 고함치고 싸우는 가장. 축 늘어진 어깨, 무거운 트렁크를 양손에 들고 지친 걸음으로 귀가하는 가장의 모습이란 고달픈 우리들의 초상 그대로가 아닌가. 그래서 윌리로 분한 주용욱의 감회는 더욱 각별하다. 30년 간 연극을 팔아온 어쩌면 그도 '세일즈맨'이니까.
그는 '관객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연극'이라는 한 화두에만 매진해 왔다. 신혼여행길에 대본을 들고 간 일화는 이미 유명하다. 체계적 이론 무장이 없음에도 그의 소박한 일상 연기는 빛이 난다. 그리고 그는 인간적이다. 후배의 공연도 빠짐없이 관람하고 축하하며 그들의 원망도, 푸념도
소주잔 기울이며 밤새 들어준다. 97년 부산연극제에서 우수 연기상을 수상했을 땐 연극인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기도 했다.
"윌리에게 세일즈맨은 일이 아니라 꿈이었지요. 멋드러진 모자, 반짝이는 구두를 신고 방방곡곡을 떠도는 낭만과 희망. 제겐 연극이 그랬습니다. 무대 위에만 서면 어떤 고난과 시련도 감당할 수 있으리란 자신감이 솟았으니까요"
주용욱을 통해 다시 '태어난' 윌리. 무대 위에 선 것이 윌리인지 주용욱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그만큼 윌리에 동화되어있기 때문이리라. 물론 윌리는 지나가는 차에 몸을 던졌지만, 그는 조명이 그를 비추지 않는 날까지 무대를 지킬 것이라는 점은 다르지만 말이다.
석 달을 공들인 연극이 7일 막을 내렸다. 사나흘 여행이라도 다녀왔으면 싶지만 그의 발걸음은 아이들이 기다리고있는 학교로 향한다. 지식을 파는 교사가 아닌, 마음으로 사랑을 나눠주는 '진짜 세일즈'를 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