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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

독자여러분, 혹시 동조궁을 아십니까?

동조궁을 알리는 석물 표찰이다. 맨 위, 꽃잎 형태의 금박문양 세 개가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紋章)이다.

도쿄 프린스호텔 뷔페식당에서 이른 조식을 먹고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는 동조궁(東照宮)으로 향했다. 동조궁은 닛코에 있는데 한자로는 '日光'으로 표기하며 '하루 종일 해가 지지 않는다'는 뜻이 숨어 있다고 한다.

동조궁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기리는 사당으로 원래는 그리 크지 않은 신사였으나, 에도막부의 3대 장군이자 이에야스의 손자인 도쿠가와 이에미스(德川家光)가 조부를 기리기 위해 일본 전역에서 15,000명의 장인과 450만 명의 인력을 동원해 1643년에 착공, 1년 5개월 만인 1636년에 다시 전면적으로 개수한 사당이다.

도쿄에서 닛코 국립공원으로 향하는 편도 3차로 고속도로에는 겨울바람이 심하게 불고 있었다. 먼 산의 울창한 삼나무들이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이 보였고, 고속도로변에 빼곡이 들어찬 붉은 동백은 여린 꽃잎을 바람에게 잔인하게 유린당하고 있었다. 기후 탓인지 일본 고속도로에는 이렇게 어김없이 동백이 심어져있었다. 한겨울에 보는 붉은 동백의 고고한 자태는 여행객에게 아려한 서정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했다. 나는 붉은 물감처럼 점점이 흩뿌려진 동백과 먼 산의 울창한 삼림을 번갈아 감상하다가 어느새 스르르 잠이 들어버렸다. 작은 밴으로 2시간 30분이나 달려야하는 닛코는 일본에서도 너무 먼 거리였다.



동조궁 입구에는 높이 9m, 둘레 3.6m의 화강암 도리가 있는데, 1618년 후쿠오카에서 가져온 것으로 일본에서는 가장 큰 석조 도리(石鳥居)라고 한다. 일본 어느 神社에서나 볼 수 있는 특유의 상징물이다. 특히 일본에서 새는 인간과 하늘을 연결하는 중요한 영매로 취급하기 때문에 도리에 쓰인 듯하다.

일본의 도리는 그 역할이 우리의 홍살문과 비슷한데 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안으로 들어갈수록 폭이 좁아져 입체감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동조궁에 들어서면 제일먼저 만나는 원숭이 조각상이다. '보지도, 말하지도, 듣지도 않는다'는 뜻의 원숭이 조각상이다. 이 원숭이 조각상은 마구간 위에 붙어 있는데, 원숭이들이 말을 병마로부터 지켜준다고 믿기 때문에 마구간에 위에 설치한 것이라고 한다. 이 마구간을 지나면 제일 안쪽에 신사 건물이 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금박으로 장식해 호화스럽다.



동조궁의 오층 목탑이다. 1818년 건립된 것으로 높이가 31.8m이다. 탑의 5층 부분은 중국양식을 갖추고 있으며 기와와 처마부분은 금박이이고 나머지는 채색이다.

특이한 점은 아름드리 삼나무를 통째로 탑 중앙에 넣고 쌓아 웬만한 지진에도 흔들림이 없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신사 어디를 이런 기원 종이를 볼 수 있다. 흰 종이에 깨알같은 글씨로 낱낱의 소원을 적어 절이나 신사 입구에 걸어놓는다.



동조궁은 이런 크고 작은 건물 20여 채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들의 주요 부위마다 금도금을 입혔는데, 동조궁에만 약 8톤의 순금이 들어갔다고 한다. 동조궁 안에는 많은 전각이 국보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되어 세계적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동조궁 아래에는 린노사, 서쪽에는 닛코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인 후타라산 신사가 있다.



동조궁 정문인 요메이문(陽明門)이다. 일곱 가지 채색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이 문은 정교한 400여 개의 조각과 문을 받치고 있는 12개의 둥근 기둥, 독특한 건축 양식이 어우러져 도쇼구의 한 축을 이룬다.



동조궁 내에는 이런 깃발들이 지천이다. 형형색색의 깃발이 괴성을 지르며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다.



일본은 어디를 가나 이런 아름드리 삼나무가 지천이다. 삼림을 잘 가꾸는 일본인들의 근면성도 한 몫 하지만, 우선 지질학적으로도 일본은 한창 혈기왕성한 청년기 땅에 해당한다고 한다. 따라서 지력이 쇠한 노년기 땅인 우리나라에 비해 나무가 곧고 크게 자란단다. 대신 활발한 화산과 지진이 큰 단점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조각상으로 엄격함과 자상함이 동시에 묻어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비롯한 최상위 권력층이 마셨던 술통들을 모아 둔 곳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생전에 타던 가마이다. 동서남북 네 방면에 금으로 용무늬를 새겨 넣었는데 비늘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너무 완벽한 용 조각상이기에 비늘을 달면 실지로 승천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실제 무덤이다. 현재는 화장해서 유골만 묻혀있다고 한다.

인질 소년에서 천하 영웅이 되기까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542년 태어나 여섯 살에 오다 노부히데의 인질이 되어 3년 간 피나는 고초를 겪다 풀려나 다시 아마가와 요시모도의 전사 후, 오다 노부나가의 도움으로 겨우 세력을 펼칠 수 있었다. 14년 간에 걸친 인질 생활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1582년 오다 노부나가의 사후, 그의 아들 오다 노부오와 힘을 합쳐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소목산 전투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그러나 천하의 대세가 이미 풍신수길에게 있음을 간파한 덕천가강은 풍신수길과 화해하고 그의 수하가 되었다. 백 보 전진을 위해 일 보 후퇴를 택한 전략이었다.

1598년 풍신수길이 죽자 이시다 미쓰나리와 대립, 1600년 세키가하라의 싸움에서 대승하여 천하의 실권을 장악한 뒤, 1603년 세이타이 쇼군이 되고, 에도에 막부를 열었다. 뒤에 두 차례의 오사카 출진에 의해 토요토미가를 멸하고, 천하를 통일, 도쿠가와 15대의 기초를 닦아 놓았다.

1616년 4월 17일 숨을 거두며 닛코에 묻어달라는 유언과 함께 이런 유훈을 남겼다.

"인간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길을 가는 것과 같다. 서두르면 안 된다. 무슨 일이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다는 걸 알면 굳이 불만을 가질 필요가 없다. 마음에 욕망이 생기거든 곤궁할 때를 생각하라. 인내는 무사장구(無事長久)의 근본, 분노는 적이라 생각하라. 승리만 알고 패배를 모르면 해가 자기 몸에 미친다. 자신을 탓하되 남을 나무라면 안 된다. 미치지 못하는 것은 지나친 것보다 나은 것이다."

과연 인내의 달인다운 처세철학이다. 흔히 일본에서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역사상의 3대 영웅이라 부른다. 이 세 사람의 인물됨을 단적으로 비교하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한다.

'두견새가 울지 않을 때 노부나가는 때려죽이고, 히데요시는 울도록 만들며, 이에야스는 울 때까지 기다린다.'

여기서 '두견새'를 '상황'이란 말로 바꾸어 놓으면 더 이해하기가 쉽다. 즉 노부나가는 어떤 일을 해야 할 때 그럴 상황이 아니라도 과단성 있게 추진하는 경향이 있고, 히데요시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지략을 짜내 상황을 만들어내며, 이에야스는 오로지 기다리면서 자연적으로 상황이 형성될 때까지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쉽게 표현하자면 '결단력'의 노부나가, '지략'의 히데요시, '인내'의 이에야스가 된다.

적을 쓰러뜨리고 난세를 평정하자면 강인한 결단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것을 마무리하는 데는 남다른 지략이 필요하다. 그러나 결단력과 간사한 지모만으로는 안정된 천하를 유지할 수 없다. 그들의 결단과 지모는 수습된 혼란을 되살아나게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도구가와 이에야스는 오랜 시간 인내하며 이 두 가지를 합리적으로 이용해 결국 천하를 통일한 것이다.

이밖에도 도쿠가와 이에야스하면 임진왜란 때 유일하게 우리나라에 병력을 파견하지 않은 쇼군으로 알려져 있다. 후일 그 보답으로 우리 조선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범종을 선물하기도 했다.



동조궁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수많은 관람객들과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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