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천황이 거주한다는 황거(皇居)이다. 둘레는 8km의 방어용 연못인 해자로 둘러싸여 있는 천혜의 요새이다. 저 멀리로 보이는 아치형 다리가 황거로 들어가는 고쿄도리이다.>
현재 일본 천황이 살고 있는 곳은 도쿄의 중심가이다. 동서남북 4면이 모두 사통팔달 해 있어 한눈에 보아도 교통의 요지임을 알 수 있었다. 리포터가 황궁을 들렀을 때에는 마침 일요일 아침으로 많은 사람들이 황궁 관람을 즐기고 있었는데, 유독 중국인 관람객들이 많았다.
<중국인 관람객들이 황궁 돌담을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 한겨울인데도 버드나무가 연초록을 띄고 있는 모습이 신기했다.>
<황궁 주변의 해자들>
일본에서 천황에 대한 역사는 꽤 오래되었다. 일본의 옛 역사를 기록한 고사기(古事記, 712년 편찬)와 일본서기(720년 편찬)를 보면 기원전 660년경에 이미 초대천황인 진무(神武)가 즉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천황'이란 말의 유래를 살펴보면, 도교의 천황대제에서 온 말이다. 일본이 7세기 초에 중국 수나라에 사신을 보낼 때 수나라의 황제라는 말에 대응한 말로써 이 도교의 '천황대제'란 단어의 앞 글자 두 자를 따서 천황이란 말을 생각해냈다고 한다. 이때부터 일본에 천황이란 단어가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 무렵의 천황은 원시적인 형태였고 일본에 고대국가의 모습이 정착되는 4∼5세기경에 비로소 고대 천황제의 모습이 갖추어진다. 천황은 이때부터 야마토(大和) 지방의 부족 연맹의 장으로서 정치적 권력과 종교적 권위를 갖고 일본 주요부를 지배하게 됐다. 이어 6세기말 아스카(飛鳥)시대의 쇼오토쿠(聖德)태자에 이르러서 천황의 권력이 확립됐다. 쇼오토쿠 태자가 중국 수나라에 보낸 국서에 `동천황(東天皇)이 서천제(西天帝)에게'라는 표현을 쓰면서 천황이라는 용어가 공식적으로 등장한다.
<황궁의 소나무는 일본에서도 유명하다. 일본 전역에서 가장 우량한 품종만 골라 이식한 것으로 아름드리 소나무부터 작은 분재용 소나무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와 모양이 실로 다양하다.>
<잠시 황궁의 소나무밭에서 포즈를 취한 리포터>
<황궁 앞 광장이다. 궁성의 면적은 총 25만평이 넘는다. 우리나라 덕수궁의 약 6배가 넘는 셈이다. 이 궁성은 옛날에는 '에도죠'라고 불렸고, 전적으로 농민들의 부역으로 건설된 것이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까지 일본인들은 천황을 '살아있는 신'으로 믿어왔다. 그러던 것이 그 해 8월 15일 역사상 처음으로 천황은 라디오에 대고 항복 선언을 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신이 아니며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천황의 고백을 들은 일본국민들은 모두다 큰 충격에 빠졌다. 그 일을 계기로 천황은 신이 아니고 일개 인간이라는 뚜렷한 인식을 비로소 갖게 된다.
천황이나 황족들 또한 과거의 권위적인 이미지를 버리고 간단한 경호원만 대동한 채 자주 외출을 한다고 한다. 손자 손녀들의 학교 운동회에도 참가하고 시내 백화점에도 들러 쇼핑도 하는 등 보통의 평범한 시민으로 생활하고 있다.
<황궁의 출입문이다. 평일에는 들어갈 수 없고 주말에만 잠깐씩 개방한다.>
그러나 아직도 지방 농민들이나 연로한 노인들은 천황을 살아있는 신으로 생각하여 궁성 앞 자갈밭에 무릎을 꿇고 합장을 하며 천황의 만수무강을 빌곤 한다. 이것은 천황이 신이냐 인간이냐를 떠나 천황을 존경한다는 뜻이다. 단적인 예로 일본인들은 황거(皇居)를 정리하고 청소하는 봉사활동을 평생의 명예로 생각한다. 봉사단원들은 전국각지에서 3박 4일 간의 일정으로 상경하여 아침 8시 30분부터 오후4시까지 황거에 출근하여 미화작업을 한다. 봉사활동에 소요되는 여비, 숙박비, 식대 등 일체의 경비는 모두 본인이 부담한다. 그래도 이런 봉사활동이 50년 이상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것으로 보아 일본인들은 천황을 구심점으로 삼아 더욱 강한 일본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