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현민이의 생일이었다. 교실에 들어선 현민이의 눈치를 살피니 생일이지만 즐거운 표정이 아니었다. 미역국은 먹고 왔을까? 할머니랑 사니 그래도 미역국은 먹고 왔기를 바랬다. 묻고 싶었지만 아침 독서를 방해할까 봐 꾹 참았다. 독서 시간이 끝나고 숙제검사를 한 뒤 일기장을 미리 읽어 보았다. 생일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걸로 보아 아이가 기대하는 일은 한 가지도 없어 보였다. 아무래도 작은 이벤트를 해야할 것 같았다.
"얘들아, 오늘이 현민이 생일인데 친구들이 뭐 준비한 건 없니?" "현민이도 내 생일에 아무 것도 안 주었는데요?" "지난 번 바른생활 시간에 현민이에게 미리 축하 편지를 썼잖아요?" 상황을 보니 모두들 시큰둥했다. 현민이에게 선물을 줘 봐야 자기들 생일에 선물을 받지 못할 것을 미리 생각하는 아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아이, 꼭 선물을 해야 하는가 의문을 가진 아이까지 있었다.
"얘들아, 꼭 돈을 주고 산 선물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친구를 기쁘게 할 수 있는 선물이 있는데..." "예, 선생님! 편지를 쓰는 겁니다." "맞아요. 편지는 마음을 전하는 글이니까 없어지거나 닳아지지도 않고 오래도록 간직하면서 친구의 아름다운 마음을 느낄 수 있지요. 우리 조금 힘들더라도 국어 시간에 배운 것처럼 글을 써 볼까요? 그리고 거기에다 예쁜 그림까지 곁들이면 더 좋겠지요? 선생님은 미리 써 왔는데."
"정말이에요. 선생님?" "그럼. 두고두고 보라고 우리 반 홈페이지에까지 올려 놓았지. 현민이가 힘들 때마다 들어가서 읽어보라고 말이야." "자, 그럼 지금부터 친구에게 생일 축하 편지를 쓰기로 합시다. 그리고 현민이는 아버지와 할머니께 감사하는 편지를 쓰면 됩니다. 자기 생일에 하루 종일 물 한모금도 마시지 않으며 어머니의 고통을 생각하지는 못하더라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생명을 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는 편지 정도는 써야겠지요? 그 다음에 축하받는 거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반의 네 아이는 축하편지를 쓰고 현민이는 감사편지를 쓰기로 했다. "선생님, 그럼 공부는 언제 해요?" "이게 진짜 공부인데. 국어 공부 시간에 배운 글쓰기 공부, 바른생활 시간에 배운 친구 사랑하기, 즐거운 생활에 배운 예쁜 그림 그리기까지 다 들어가잖아요. 여러분이 학교에서 공부 시간에 배운 것들을 직접 실천하는 것이 진짜 공부랍니다."
아이들이 써 낸 편지를 모아놓고 집에서 가져온 간식용 바나나와 우유를 내놓은 다음 미리 준비해 온 티셔츠를 입혀놓고 우리들은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주었다. 미역국마저 먹고 오지 못했다는 아이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그렇게 해서 우리 반은 현민이의 생일을 다 함께 기뻐하며 생일이 주는 의미를 공부하고 친구를 위하여 실천하는 글쓰기까지 했다. 아이들도 참 좋아했다. 편지 쓰기를 즐겁게 얼른 하기란 어른인 나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글을 깨우치고 하고 싶은 말을 글로 표현할 줄 아는 2학년 단계에서는 될 수 있으면 글 쓰는 기회를 많이 주어서 글샘을 자극해야 한다.
편지지 한 장 정도는 얼른 써낼만큼 글힘이 커진 아이들이다. 그 동안 읽기 책 한 쪽씩 날마다 외우고 받아쓰기와 하루 3권 이상 읽기와 독서학습지 기록으로 다져진 실력이다. 이미 읽기 책은 너덜너덜해졌다. 아이들의 손 때가 묻고 몇 번이나 찢어질만큼 닳아졌다. 친구들이 준 편지를 받아들고 행복해 하는 아이 마음 속에 자신을 염려하고 위하는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긴 인생 길에서 외롭지 않으리라 믿고 싶다.
2학년짜리 아이에게 부모의 그늘은 절대적이다. 그 아이는 지금 강을 거슬러 오르는 삶을 살고 있다. 집에 돌아가면 자신의 공부를 봐 주거나 격려해 줄 사람이 없다. 연로하신 할머니가 겨우 의식주만 해결해 줄 정도이다. 그 아이기 겪는 좌절의 깊이를 헤아리며 다른 아이들보다 더 많이 충고하고 칭찬하며 다독임이 절실함을 깨닫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가 겪는 좌절의 시간이 인생을 통찰할 수 있는 지혜를 만나는 길이 되기를 빌어마지 않는다. 강을 거슬러 헤엄치기를 잘 했던 위대한 인물들처럼, 공자님이나, 오바마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하지 않은 어린 날의 아픔을 디딤돌로 삼아 자랑스럽게 커 가길 비는 마음 간절하다. 그 아이가 흐르는 물결 속에 몸을 내맡기고 그저 흘러가는 삶이 아니라 자신의 역경에 지지 않고 날마다 거슬러 오를 수 있도록 튼튼한 체력과 정신적 내공을 다져 주는 일이 내가 할 일이다. 오래도록 그 아이 마음 속에 남아서 힘든 길을 오를 때 나의 편지 한 장이 힘이 되어주기를 빌어본다.
<사랑하는 현민이에게> 현민이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해! 현민아, 6월 4일 오늘이 현민이 생일이지? 너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해! 현민이는 참 좋은 계절에 태어났구나. 아카시아 꽃향기가 넘치고 초록으로 뒤덮인 아름다운 나무들이 우거진 계절에 태어났으니 말이야.
선생님은 우리 현민이가 참 자랑스럽단다. 부모님과 함께 살지 못하고 할머니랑 살면서도 씩씩하고 밝게 살아가는 모습이 아주 대견하단다. 요즈음은 글씨도 아주 잘 쓰고 아침마다 독서도 잘하여 예쁘지. 그리고 점심 시간에도 밥 한 톨, 반찬 한 가지 남기지 않고 감사한 마음으로 잘 먹으며 더 먹고 싶어도 음식 욕심을 부리지 않으며 자기를 이기는 모습이 얼마나 기특한지! 선생님들께 날마다 자랑을 하지. 친구들과 싸우지 않고 다정하게 지내는 모습도 참 좋아.
현민아, 생일은 너를 있게 해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는 날이란다. 그런 다음 축하받는 날이야. 지금은 비록 함께 살지 못하는 아버지이지만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너를 지금처럼 잘 키워 주시느라 고생하고 계신 할머니께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큰 절을 올리기 바란다. 현민이가 열심히 공부하고 착하게 자라서 성공하여 사랑하는 아버지랑 함께 사는 날이 오기를 빌어줄게. 그러려면 이도 잘 닦아야 건강하겠지? 집에 가면 컴퓨터 게임을 너무 많이 하지 않아야겠지? 지금보다 숙제도 더 잘 해야 공부도 잘 하겠지?
현민아, 네가 잘 자라기를 바라며 작은 선물을 마련했단다. 현민이가 예쁘게 입었으면 좋겠구나. 선생님이 엄마 노릇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네가 훌륭하게 자라서 성공할 수 있도록 열심히 가르치고 착하게 살도록 잔소리도 많이 할 생각이니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거라. 나무는 아름답게 자라기 위해 아픈 가위질도 싫어하지 않고 한 송이 국화꽃도 고운 꽃을 피우기 위해 잎이 잘리고 가지가 부러지는 고통을 참아낸단다. 사람도 마찬가지야. 훌륭하게 성공하려면 선생님이나 부모님, 할머니의 잔소리를 잘 새겨 듣고 잘못을 고치도록 노력해야 한단다.
사랑하는 현민아, 네 이름처럼 현명한 사람으로 잘 자라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며 다시 한 번 너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