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와 달과 별은 하늘의 문장이고, 산과 내와 풀과 나무는 땅의 문장이며 시와 서와 예와 악은 사람의 문장이다. 하늘의 문장은 기운으로 짓고, 땅의 문장은 형상으로 짓지만 사람의 문장은 올바른 길로 이루어진다. 이 때문에 사람의 문장은 도(道)를 싣는 그릇이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인문(人文)이다. <정도전 삼봉집>"
좋은 글을 쓰고 싶은 목마름에 늘 책을 향한 향수와 그리움을 안고 살며 차오르지 못하는 메마른 나의 글샘에 좌절하면서도 차마 포기하지 못하고 다시금 자판 앞에 앉기를 거듭하는 병을 나을 길은 진정으로 없는 것일까?
눈만 뜨면 천지에 가득한 하늘의 문장과 땅의 문장을 보면서도 그것을 그려낼 내 마음의 문장은 어디에 있는지 마음을 헤집고 다니는 일상의 목마름과 한숨. 그러면서도 다시 돌아와 펜을 들고 돋보기를 끼고 책을 찾아 문장을 찾아 날마다 미로를 헤매며 문장의 도를 구하는 중생인 나의 모습.
그런 미로 찾기에서 한 줄기 서광으로 나를 끌어당긴 책은 바로 우리의 옛 조상의 숨결을 살려서 책으로 선보인 <조선지식인의 글쓰기 노트>였다. 모두 255개의 목차만으로도 글쓰기의 정형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책이다. 특히 사람의 문장은 올바른 길로 이루어지며 도를 싣는 그릇이라는 대목에서는 쇠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깨달음 비슷한 것을 얻으며 행복했다.
글쓰기의 첫 단추를 찾았다고나 할까. 나름대로 해석한 뜻은 글쓰기의 기본은 먼저 올바르게 살며 도(도)를 이루어 그릇을 만들어, 하늘의 기운과 땅의 형상을 그 그릇에 담아 마음의 눈으로 그릴 수 있는 눈과 귀를 가지는 일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이 책은 글쓰기에 대한 조선 지식인들의 사유와 기록을 살펴서 발췌해 놓은 책이다. 옛 선비들의 문장과 글쓰기에 대한 생각 속에서 글쓰기에 대한 사유와 그 속에서 발견한 깨달음을 소개한 책이다. 엮은이는 선조들의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통해 글쓰기는 하루아침에 배울 수 있는 잔재주가 아니라 머리에, 마음에 쌓인 생각이 저절로 드러나는 것임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고 있다.
글쓰기에 대한 책들도 외국의 것들이 더 많은 출판 시장이다. 우리 땅에서 우리들과 비슷한 생활방식과 언어, 풍속으로 살다간 선인들이 남긴 고전을 연구하여 원전에 충실한 번역으로 그 숨결을 살려낸 <고전연구회 사암>의 결실이기도 하다.
한글세대가 대부분인 청소년층을 대상으로 한 책이지만 글쓰기를 향하여 더듬이가 돋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라도 두고두고 읽으며 누구에게 빌려주기 아까운 책이 되리라 믿는다. 255가지에 이르는 조선 지식인들은 좋은 글쓰기란 하루아침에 쌓은 잔재주가 아니라 꾸준하게 닦은 공력에서 나온다고 이야기한다.
박지원, 이덕무, 이수광, 이익, 정약용, 홍길주, 홍석주, 허균, 최한기 등 한 시대를 풍미한 문장가들의 글과 이야기가 담겨 있으니 원전을 읽지 못하는 나와 같은 한자에 문맹인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길잡이다.
특히 가슴 저린 대목은 "글을 쓰는 핵심은 백성을 구제하는 것"(최한기)이라고 단언한 대목에서는 글 쓰는 사람의 무거운 책무를 생각하며 나는 글을 쓸 자격조차 없다는 절망감에 휩싸였다. 신변잡화식 글쓰기로 얕은 사려와 사고의 빈곤, 낮은 눈높이, 발밑만 바라보고 사는 근시안적인 경험 세계 속에서 어떻게 누군가를 구제하는 글을 쓸 수 있을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글쓰기라는 이름으로 내디딘 내 발자국이 여기서부터 더 이상 비뚤어지지 않게 하여 나부터 구제하는 일에 힘쓰다 보면 실오라기 같은 희망 한 줌이나마 건져서 내 가까운 가족과 우리 반 아이들에게 쓸만한 씨앗 하나쯤 키울 수 있으리라는 소망을 가지게 한 책이기도 하다. 글쓰기를 좋아하고 원하는 사람에게는 분명히 어둔 밤의 등불이 되어주기에 충분한 책이다.
희망을 갖게 한 소동파의 격려를 통해 나처럼 나약한 의지로 가난한 글샘을 슬퍼하는 이가 있다면 위로를 받으시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여 여기에 옮겨본다. "문장은 정교하게 세공되어 있는 금이나 아름다운 옥과 같아서 스스로 정해진 값어치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사사로운 감정으로 귀하다거나 천하다고 하기가 어렵다."
이는 나처럼 진품 보석 같은 글 한 편 가지지 못하고 모조품에 가까운 글을 껴안고도 고슴도치가 제 자식 아끼듯 가난한 글방에 드는 손님이 없다고 한탄하는 사람에겐 천금과 같이 귀한 격려가 되었다. 이제부터 한 그루 나무를 심듯 새로운 글 이랑을 만들어 자갈을 들어내고 밑거름을 주는 기초공사부터 다시 해보며 도전해 보려 한다.
비록 육성으로 듣지 못하고 원본을 해석해 놓은 간접 독서일지라도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노트>는 내 곁에서 늘 소금 같은 짠맛으로 나를 채찍 하는 스승이 되어 주리라 확신한다. 최소한 255개의 글쓰기 금언들만 가지고 다니며 글쓰기 전에 약을 먹듯 깊은 맛을 느끼며 음미하노라면 내 생애 언젠가 딱 한 번만이라도 환하게 웃을 그날을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은 행복한 예감!
마지막으로 글쓰기의 스승으로 삼고 있는 '다산 정약용'의 <다산시문집> 속에 오는 글로 독자 여러분께 이 책의 일독을 강권하는 바이다.
" 사람이 글을 쓰는 것은 나무에 꽃이 피는 것과 같다. 나무를 심은 사람은 가장 먼저 뿌리를 북돋우고 줄기를 바로잡는 일에 힘을 써야 한다. 그러고 나서 진액이 오르고 가지와 잎이 돋아나면 꽃을 피울 수 있게 된다, 나무를 애써 가꾸지 않고서 갑작스레 꽃을 얻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나무의 뿌리를 북돋아주듯 진실한 마음으로 온갖 정성을 쏟고 줄기를 바로잡듯 부지런히 실천하고 수양하고, 진액이 오르듯 독서에 힘쓰고 가지와 잎이 돋아나듯 널리 보고 들으며 두루 돌아 다녀야 한다.
그렇게 해서 깨달은 것을 헤아려 표현한다면 그것이 바로 좋은 글이요, 사람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는 훌륭한 문장이 된다. 이것이야말로 참다운 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문장은 성급하게 마음먹는다고 해서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노트>포럼/9,800원/고전연구회 사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