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미움이 사람이 살아가는 일상사의 연극이라고 한다면, 나와 타인과의 관계는 사랑과 미움의 속편으로 이어지는 삶일까? 남을 사랑한다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면서도 참으로 어려운 일 중의 하나인 것 같다.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지만, 남을 사랑하는 마음이 내면에 솟아난다는 것은 나를 타인의 마음으로 동등하게 이끌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베이징 올림픽이 열리는 것도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서로 간의 화해의 제스처를 서로 주고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듯이, 학교에서도 학생이라는 대상을 모르고 교사가 학생을 올바르게 가르칠 수는 없는 일이다. 특히 요즘 학생들은 빠르게 변하는 문화에 쉽게 적응하는 반면 교사들은 이에 조응되지 못하는 의식구조가 현장 교육에 커다란 문화지체로 나타난다고 하면 과연 억설일까?
프랑스 철학자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관계를 ‘하나의 신비와의 관계’라고 말했다. 사람의 심리를 읽어내는 심리학자가 아니고서야 타인의 내면의 세계를 꿰뚫어 본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나이 먹은 교사가 어린 학생의 마음을 바로 이해하지 못해서 회초리를 들고 종아리를 때리고, 그것도 부족해 더 심한 타격을 가하는 것이 종종 신문지상에 보도되어 교사의 체면에 먹칠을 하는 때가 나타나곤 했다. 이것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교사 자신의 수양 부족일까? 아니면 학생이 자기만의 세계에서 생각하기 때문일까?
교사와 학생의 두 측면을 두고 저울질 해 본다면 어디로 기울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은 학생이 보는 올바름과 교사가 보는 올바름의 척도가 다른 데 있음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전통 교육을 받은 옛 교사들은 올바름과 그른 것을 교과서에서 교사들의 말에서 배웠지만, 오늘의 학생들은 옳고 그른 것을 컴퓨터와 TV, 전자게임 등에서 배우는 것이 훨씬 많다. 전자게임은 주체가 기계를 어떻게 조종하느냐에 따라 이기고 진다.
그런데 게임을 하는 주체는 중간에 자신이 지고 말면 게임 도구를 보고 욕설을 퍼 붓기도 한다. 그것도 심하면 던져버리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것을 저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기의 것이기에 자기만이 최고의 주인이고 자기만이 통제자로서의 행위를 서슴없이 자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타자를 사랑하는 마음은 사람이기에 사랑을 베풀어야 하고 사물이기에 내 마음대로 욕설을 하고 아무데나 팽개쳐 던져두는 것은 진정한 타자의 사랑이 아니다. 이것을 사랑이라고 한다면 이는 면종복배의 인간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남의 물건을 아끼고 소중하게 할 때 내 물건도 소중하게 다루게 되고 그에 따라 대상에 대한 범신론적 사랑이 마음에 소록소록 피어나게 마련이다.
주변을 살펴보고 주변을 철저한 방벽을 쌓아도 마음의 벽만큼은 굳어질 수 없다. 굳게 쌓아 논 성벽도 마음먹기에 따라 하루아침에 무너뜨릴 수 있다. 이처럼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굳은 결심은 자기를 다스리는 인내의 결과로 이루어질 수 있다. 그 인내 역시 교육의 결과로 더욱더 굳어지고 그 굳어진 결실이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에 대한 통제로 이어지고 나아가서는 너와 나의 사랑의 세계관으로 확대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작은 실천은 자신이 처한 주변을 깨끗하게 하는 것도 사물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고, 자신이 입고 있는 의상도 자신의 몸을 보온하는 차원을 넘어 타자에 대한 사랑을 받고자 하는 데서 다양한 꾸밈새를 찾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