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 14일. “중앙일보” 사회면에 실린 기사다. 사랑의 매. “허용하자”는 용어가 급기야 언론에 보도되면서 우리 사회가 처하고 있는 학교 교육의 실상을 다시 한번 되새기는 계기가 되고 있다. 전연택의 소설 “화수분”처럼 아무리 퍼내어도 마르지 않는 재물단지처럼 교육 사랑도 누구에게나 조건 없이 베풀어도 해되지 않고 오히려 자신에게 득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학교에서 베푸는 교사 사랑과 가정에서 베푸는 부모 사랑은 왜 역반응으로 다가오는 듯 할까? 부모를 죽이는 청소년, 교사를 치고 욕설을 퍼붓는 학생들, 웃어른을 공경하기보다는 멸시의 대상으로 보는 청소년들 이런 것들이 오늘의 한국 사회에 기성세대들이 신세대에게서 받는 설움의 한 양상들이다. 기성세대들이 이들에게 베푸는 아가페적 사랑은 바람 앞에 등잔불이었단 말인가?
행운의 숫자 7번, 학교 교육과정의 7차, 참으로 마르고 닳도록 부르짖던 숫자의 종말은 행운으로 나타났던가? 유토피아처럼 꿈꾸었던 교육의 열반의 경지. 거기에서 진정 바라고 추구했던 인간상이 나타나기를 고대하였을까? 마치 동화의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낙원이 한국의 온 학교에서 피어날 것을 기대하고 회초리를 거두고 서구화된 인간교육으로 개성 교육에 최선을 다해 보자는 OECD교육 지표가 교육 정책 관리자의 헤드쉽에서 창안되었음은 자타가 공인하는 터다. 하지만 배우가 입는 옷처럼 연극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던 겉치레 교육은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았다.
회초리를 맞으면서 공부를 했고, 회초리에 의해 인성이 다져졌던 기성세대들의 자녀 교육도 서구화된 과학 교육의 근본을 따라 가기에는 아직도 요원하기만 했다. 탈을 쓰고 연기를 하는 배우의 몸동작이 배우의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이 아닌 것처럼 교육의 현장을 지켜가는 진정한 서구식 교육은 수박 겉핥기식 교육에 지나지 않았고 급기야는 회초리 교육의 부활을 외치는 분위기로 돌아서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살아있는 현장 교육이 되어야 한다. 생동감 있는 시장 경제에 맞추어 교육이 추진되어 가야 한다는 미명하에 교육의 수준은 교사의 능력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허울 좋은 소리에 교사의 학력 향상에 직무 교육에 안간힘을 쏟아 붓는 듯 하였지만 그것은 빠르게 흐르는 사이버스페이스의 이상 공간을 달려가는 청소년들의 현실을 모르고 하는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로마의 찬란한 문화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듯이, 한국 교육의 회초리 문화가 한순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웃어른에게 고개를 숙이는 인사법이 서구 문화의 유입으로 한국의 전통 예법이 더욱 공고하게 된 것이 아니라 서구라는 사이버스페이스에 휘말려 교사와 학생 사이가 더욱 멀어지고 있는 느낌이다. 가상공간이라는 자유공간이 학생들을 더욱 소외시키고 타인과의 협력관계를 도외시하고 있지는 않는가?
자율학습이라고 하여 학교에서 다같이 협동학습 차원에서 하는 것을 외면하고 타인이 떠들어서 안 되고, 환경이 좋지 않아서 안 되고, 혼자해야 공부가 잘된다는 등의 별별 구실을 다 만들어 더불어 공부하는 관행을 거부하는 현상은 비록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고 할지라고 학생들의 흐름은 확연히 예전보다는 더 이기적 개성으로 변화되고 있음은 부인하지 못할 것 같다.
회초리 문화가 서구화된 교육 풍토를 한국형 교육 풍토로 만들어 갈 수 있다는 학부모들의 여론이 앞선다고 하면 회초리 허용은 심도있게 고려해 볼 일임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교복도 자율화, 머리도 자율화해 보지 않았던가! 그 결과가 무엇을 가져 왔던가? 문화란 그 환경에 조응되고 그 사회 구성원들에게 접맥되어 갈 때 문화의 힘은 피어나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