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는 평균수명이 약 70년으로 가장 오래 사는 새이다. 그러나 독수리가 70살을 살기위해서는 40살 정도 이르렀을 때 신중하고도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한다. 이때가 되면 부리는 턱 밑으로 휘어지고, 발톱은 굽어진 채로 굳어져서 먹잇감을 잡기 어려워진다. 두꺼워진 깃털로 날개도 무거워져 날아다니는 것 자체도 어려운 짐이 된다. 이때 독수리의 선택은 두 가지 밖에 없다. 1년쯤 더 살다가 그냥 죽든지, 아니면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모험을 거쳐 30년 더 살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생명 연장을 결단한 독수리는 산꼭대기로 올라가 절벽 끝에 둥지를 틀고 전혀 날지 않고 먹지도 못한 채 자기혁신을 시도한다.
우선 자신의 낡고 구부러진 부리를 바위에 쪼아 으깬다. 오랫동안 기다려 새 부리가 돋아나면 이번에는 그 부리로 굽어져 못 쓰게 된 생 발톱을 하나하나 뽑아낸다. 이때 온 몸은 피투성이로 얼룩진다. 마지막으로 새 부리와 발톱으로 낡은 깃털을 모두 뽑아낸다. 이 목숨을 건 모험에 약 150일이 소요된다. 새로운 발톱, 새로운 깃털, 새로운 부리로 변신한 독수리는 비로소 생명을 30년 연장하여 70년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환골탈태’요, ‘거듭남’이다.
‘환골탈태’란 철저하게 옛것을 벗어버리는 것이다. 새로운 삶은 잠시 동안 모든 것에서 손을 떼고 바로 고정관념의 부리와 발톱과 깃털을 버릴 때 가능하다. 새로운 비행 날갯짓을 위해서 어떤 습관과 전통, 고정관념은 과감하게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부리와 발톱을 얻기 위해 독수리같이 기다리는 것, 기다리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기다림은 무턱대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생존경쟁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변화하면서 기다리는 것이다.
동서 냉전에서 소련이 왜 미국에 밀리고 결국 패배했을까. 그것은 소련체제가 갖지 못한 ‘창조적 파괴’의 힘을 미국은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잘 나가던 소련은 ‘세계 최고의 목화’로 인정받는 우즈베키스탄 목화를 가지고 세계 최하의 셔츠를 만들고, 1950년대나 70년대의 자동차가 그게 그거였다. 반면 미국은 효율성이 떨어지는 기업은 폐쇄하고 새 기술로 설비한 회사를 키웠다. 같은 자원으로 한쪽은 최신형 자동차를 생산해내고, 다른 쪽은 20년 전의 자동차를 만든다면 누가 이기겠는가. 미국이 어쩔 수 없이 창조적 파괴를 택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힘은 바로 ‘경쟁’이었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고통스럽고 아깝지만 옛것을 파괴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쉽게 ‘변화’를 외친다. 그러나 변화는 누구나, 언제든지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독수리처럼 부리를 으깨고 생 발톱을 뽑아가며 오래 살아 무엇 하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때가 바로 쇠퇴의 길로 접어드는 순간이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현대는 ‘혁명’이라고 일컬을 만큼 모든 분야가 급변하고 있다. 교육 내용도 시대에 걸맞게 변해야 하고 교육의 주체인 교사는 더욱 그렇다. 흔히 오늘날의 교육상황을 ‘21C의 학생을 20C의 교실에서 19C의 교사가 가르치고 있다’고 말한다. 교육에 있어서 교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21C의 학생은 22C를 예언할 수 있는 ‘변화된’ 교사만이 교육할 수 있다.
최근 국가수준 학업성취도평가의 후폭풍이 거세게 휘몰아쳤다. 당초 시행 의도와는 달리 지역도, 학교도, 그리고 이제는 교사까지도 줄서지 않을 수 없게 돼버렸다.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무한경쟁 체제를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길목에 다다른 셈이다. 뜨거운 감자였던 '교원평가'도 결국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바야흐로 ‘교육개혁’은 세계적인 화두이다. 이제는 이제 우리 교육 현장도 ‘그럭저럭 지낼 수 있는’ 조건이 있다면 과감히 파괴하지 않고는 더 이상 발전하기 어려운 냉엄한 현실 앞에 서있다. 선택은 두 가지이다. 타의에 의해 끌려갈 것이지, 아니면 스스로 변화할 것인지 이다. 스스로 파괴하는 것은 생 발톱 뽑는 것같이 힘든 일이다. 교육계 스스로의 결단으로, 더 큰 도약을 위해 ‘환골탈태’ 할 때이다. 마치 독수리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