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기념일 중에는 ‘( )의 날’도 있다. 근대교과서 탄생 110주년 기념행사 자리에서 처음 논의가 시작되어, 해방 후 최초의 교과서 「초등 1학년 국어」의 편찬일인 10월 5일을 이 날로 제정했다. 이는 교과서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교과서를 활용성이 우월한 교육매체로 계승·발전시키자는 취지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희망의 세상에서 ‘철수와 영이’가 함께 공부하고 어린이의 정다운 친구 ‘바둑이’와 어울리던 모습이 고스란히 담긴 책 탄생일이 마침내 기념일로 부활한 것이다. 이 날은 바로 ‘교과서의 날’이다.
세계 최고의 교육열을 자랑하는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교과서를 생각하는 정서가 남달랐다. ‘책 중의 책’으로 여길 만큼 교과서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새 책을 받으면 먼저 표지를 정성껏 포장하고, 비를 맞아도 교과서만은 절대 젖지 않도록 애지중지했다. 지독한 가난에 교과서 살 돈이 없어 국어, 산수 책만 주문하거나 헌 책을 물려받아 공부한 사람도 있었으니, 교과서야말로 학창시절 삶의 애환이 담긴 숙명적인 동반자였다. 교과서는 우리 근대사와 함께 가장 오랜 역사를 이어온 대표적인 교육 수단으로써 ‘교과서 보는 눈은 곧 우리교육을 보는 눈’이었다.
그런데 ‘책 중의 책’ 교과서가 추억 속으로 사라질 운명이다. 교과 내용과 참고서, 문제집, 학습사전, 공책 등의 기능을 멀티미디어 요소로 통합한 디지털 교과서가 개발되어 우선 초등학교부터 보급될 예정이다. 이 미래형 교과서는 화면을 펜으로 눌러 작동하는 태블릿 PC 기반 하에 동영상, 애니메이션, 가상현실, 하이퍼링크 등 첨단 멀티미디어 기능을 갖추고 있다. 사회 각 기관의 데이터베이스와도 연계해 폭 넓은 학습 자료를 활용할 수 있는 ‘유비쿼터스’ 시스템이다.
지식과 정보의 칸막이가 일순간에 무너져 내렸다는 점에서 디지털 교과서는 ‘꿈의 교과서’로 불릴만하다. 시공을 초월하여 세계인이 연결되고 수많은 정보를 신속하게 제공하는 유익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디지털 교과서는 미래 교육환경의 새로운 대안일 수 있다. 바야흐로 금속활자나 거북선처럼 한국이 세계 최초의 디지털 교과서 상용국이 될지도 모른다.
삭막할 대로 삭막해진 디지털 세상이 만들어낸 ‘디지털 공해’ 부작용은 현대인의 ‘공공의 적’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요즘 아이들은 사람보다 컴퓨터, 책보다 인터넷과 친하게 지내다보니 어느 새 책읽기와 글쓰기를 싫어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의식보다 개인주의적인 삶에 길들여져 있다. 디지털 기술에 맹목적으로 길들여져 책을 많이 읽고 깊이 생각하기보다는 인터넷에서 손쉽게 정보를 얻는데 익숙해져 있다. 숙제나 수행평가조차 스스로 하지 않고 인터넷에 의존하는 세상이다. 사이버 세상에 갇혀 살고 있는 어린세대의 교과서마저 디지털로 대체된다면 훗날 청소년이나 성인이 된 후에도 자연히 책을 멀리하고, 장차 종이책 자체가 역사 속으로 사라질지도 모른다.
최근 일본 정부는 교육개혁 차원에서 오히려 국어, 영어, 과학 등 초·중·고 교과서의 분량을 현재보다 2배로 늘리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교과서를 수업에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자습할 때 혼자서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도록 질과 양을 개선하려는 노력으로 우리나라와는 대조적이다. 유럽 등 선진국에서도 이미 디지털교과서를 개발하고도 교육현장에 일반화하지 않고 있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오히려 현재의 종이책 교과서의 질과 양을 개선하려는 일본과 아예 종이책 교과서 자체를 없애려는 대한민국, 과연 누구의 판단이 옳은 지는 더 두고 볼 일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접근성, 편의성만을 추구하다보면 뒷면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알아보기 힘든 법이다. ‘디지털의 미래’라는 달콤한 사과 맛에 취해 정작 사과의 벌레 먹은 곳을 보지 못하는 우(愚)를 범할까 염려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