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26 (화)

  • 구름많음동두천 6.1℃
  • 구름많음강릉 12.2℃
  • 구름많음서울 6.7℃
  • 구름많음대전 9.9℃
  • 구름많음대구 12.5℃
  • 구름많음울산 14.2℃
  • 흐림광주 9.6℃
  • 흐림부산 12.9℃
  • 구름많음고창 9.2℃
  • 흐림제주 12.8℃
  • 구름많음강화 5.7℃
  • 구름많음보은 10.0℃
  • 구름많음금산 9.2℃
  • 구름많음강진군 10.7℃
  • 흐림경주시 12.4℃
  • 맑음거제 13.1℃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교단일기

체험 교육현장 37년을 마치며 ④


일반계 고교에서 8년이 지나 C상고(현 일반계고교 전환)로 발령이 났다. 과목별 인원 조정 착오로 미술교사 2명이 됐다. 내게 교생실습지도를 받은 적 있는 젊은이가 배정돼 와서 자신은 수업시수가 많아도 미술과목만 맡겠다기에 나머지 미술 4시간 한문 10시간을 가르치는 행운을 딱 1년 누렸다. 나의 전공인 미술은 학생의 개성적 창의적 발상과 수행학습이 절대적이지만 한문은 읽고 쓰고 뜻을 밝혀 문장에 적용하는 과목 아닌가. 오래 전에 국어 영어를 가르친 경험도 있고 해서 교과서 중심의 전통적 교수 학습전개 방법의 수업은 쉬웠다.

교정이 워낙 넓고 야구장까지 갖춘 학교라 처음으로 바깥에서 풍경화 실기수업을 감행했다. 이곳저곳 맘에 드는 구도를 찾아 돌아다녀야 하는 수업이라 교실에서처럼 학생들을 관리하기가 더 어려웠고 미술실수업은 청소하기가 힘들었다.

1988년 마흔 살에 이룬 방송통신대학 합격은 또 한 번의 인생 새 출발이었다. 시험을 치르기 위해 학습관에 가다가 한 번은 고등학교 제자를 만났다. 대학 4년 졸업 후 법학과 3년에 편입했단다. 전공은 달라도 나보다 선배 학년이었다. 늘 동생 같고 조카 같은 동기생들과 스터디클럽을 만들어 서로 정보를 공유했고, 녹음기가 탑재된 라디오는 매일 출근할 때마다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틈만 나면 라디오 강의를 듣고 녹음테이프를 경청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과정은 힘들었고, 특히 외국어 과목은 영어도 불어도 모두 어렵고 힘에 벅찬 공부였다.

실업계고교에서 처음 담임을 맡고 있는데 17년 전 제자 편지를 받았다. 너무나 정갈하게 써내려간 사연, 가난한 가정에서 어렵게 공부할 때 가르친 은혜 감사하다면서 힘들게 나를 찾았고 그래서 말할 수 없이 반갑다며 보내온 제자의 글이 너무나 감동적이라 모범적인 미담으로 학생들에게 소개하기도 했다. 답장을 했더니 선생님 덕분에 공납금을 감면받았던 일에 감사하며 지금 공무원으로 열심히 생활하고 있고 방송통신대학 공부를 한다는 것, 꼭 한 번 찾아 뵙겠다는 얘기, 자가용도 한 대 장만했다는 안부와 함께 조그만 선물도 보내왔다. 잊지 않고 기억해 주는 성의가 고맙다는 생각에 내게도 공부하다 받은 도서상품권이 있다면서 그에게 보냈다. 그 제자보다는 조금 일찍 공부한 만학도 선배로서 더 열심히 공부하라는 뜻으로 보내는 선물. 지금도 그로부터 받은 편지는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한 번은 특별히 말썽많은 학생을 맡게 됐다. 매일 학교까지 어머니가 승용차로 태워줘도 차가 사라지면 도망을 가거나 중간에 수업 빼먹기를 밥 먹듯 하던 그를 졸업시키기까지 우여곡절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외에도 남의 오토바이 잘못 타다 영창살이할 학생을 담임소견서로 구제한 일, 장난질에 분통을 못 참고 흡연하다 졸도한 학생 입원시키기, 시험 답안지 보여주다 0점 처리될 학생을 훈육했던 일 등 힘든 일도 있었지만, 교무실에 들어올 때마다 정중히 인사하고 모든 선생님께 무엇이든 질문하던 송00군은 있을 수 없는 학생이다.

92년부터 다시 인문계 K여고에서 근무하게 됐다. 집의 아이들도 고등학생이라 첫째는 졸업 앞두고 1년을, 둘째는 3년 동안 밤낮 없이 방학에도 운전기사 노릇을 했다. 새벽 6시면 아침을 먹고 승용차로 0교시 수업하는 아들을 학교에 먼저 등교시킨 다음 내친 김에 출근을 한다. 동과 서로 반대쪽에 위치해 보충수업도 없으면서 매일 교감선생님 다음 2등으로 교문 안에 들어섰다.

미술실 앞에서는 늘 소아마비 앓은 학생의 학부모를 볼 수 있었다. 부모가 함께 학생을 승합차로 등교시키는 등 정말 헌신적이었다. 수업 중에는 학생들이 번갈아 돌보고 하교 때에는 어김없이 부모님 직접 데려가던 지금 그 학생 현황이 궁금하기만 하다. 고생하신 그 학부모님 만수무강하시길 빌어 본다.

미술실에서 한 번은 학생 출석을 점검하던 중 빠진 학생이 있어 교실을 찾아 확인했더니 빈 교실에 학생이 뭘 긁적이며 앉아있다. 수업시간에 무슨 일이냐고 물으며 쥐고 있던 낙서 쪽지를 빼앗아 보았다. 얼른 훑어본 바로는 전날 남자친구와 무슨 불장난? 아니면 요즘 말하는 성폭행이나 불미스런 일을 당하고 그 회한이나 자기변명을 갈겨 쓴 게 틀림없다는 직감이 들었지만 강제로 쪽지를 압수하지도 신고하지도 않고 학년 말에 담임교사에게 슬쩍 알려준 적 있다. 청소년 특히 여학생 지도에는 가정교육 상 많은 허점이 있겠다고 실감한 순간이었다.

작품 스타일이 다른 후배 교사와 수업도 생활도 같이 하던 어느 날, 지금껏 경험하지 않았던 추상 작품 제작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동료 교사의 작업과정에서 힌트를 얻고 나만의 독특한 질감과 화면구성을 시도했다. 아크릴과 염색물감, 에나멜페인트를 이용하고 화면도 정식 캔버스 외에 합판이나 천막천, 하드보드, 스티로폼 등 다양하게 나름대로의 재료와 기법으로 색다른 분야의 작품을 탐구하고 제작하는 출발점이었다.

한편 독학의 길은 험난하기만 했다. 대구경북 불어불문과 입학정원 120명. 1년에 절반씩 휴학 또는 포기. 졸업년도엔 편입생까지 합쳐 7~8명에 불과했다. 입학동기 중 두 번째로 5년제 방송통신대학을 6년 만에 졸업했다고 하니 동료교사가 내친 김에 대학원 공부도 권유했지만 그 때는 무조건 쉬고 싶었다. 성적표에는 국어와 불작문 B+, 나머지는 C+도 있고 D0까지 있었다.

1994~1995년에는 대구시교육청 인문계고교 교육과정 연구개발 위원으로 위촉돼 2년간 교육과정 및 교과서 개편에 대한 계획수립과 방향설정에 동참하는 산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배너



배너


배너
배너